"금천아는 말이죠, 행동이 방자해서 내가 내어 쫓았어요.

십년동안 데리고 있던 애라 참을대로 참으면서 사람이 되도록 타이르기를
수도 없이 해보았지만 나아지는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아 결국 내어쫓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보옥이가 어쨌다구요?"

왕부인은 금천아가 보옥의 수작을 받아주다가 쫓겨난 사실은 감추고
말하지 않았다.

"금천아가 죽은 것이 정말 보옥이랑 관련이 없다는 말이야?"

"그럼요.

내가 금천아를 내어쫓을 때 그 동생 옥천아도 있었고 여러 시녀들도
있었는데, 그들을 증인으로 다 데려와볼까요?"

이쯤 되니 가정은 보옥을 때리는 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가환이 녀석의 말만 듣고 속이 뒤집어져 보옥을 거의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던 자신이 성급했다는 자책감이 들기도 하였다.

가정은 맥이 풀려 한숨을 푹 쉬며 그만 높은 의자에 덜썩 주저앉았다.

왕부인이 길쭉한 걸상에 엎어져 있는 보옥에게로 달려가 안아 일으켜
보았다.

얼굴이 핏기를 잃어 백지장 같고 숨은 끊어질 듯 가늘기만 했다.

곤장을 맞은 아랫도리는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왕부인이 급히 허리띠를 끌러 바지를 들추어보려 했지만 바지천에 피가
엉겨붙어 있어 잘 되지 않았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왕부인은 보옥을 끌어안은 채 옆에 사람들이 있는
것도 잊은듯 크게 통곡하였다.

"아이구, 불쌍한 자식아, 지지리도 복도 없지.

아이구, 이게 무슨 꼴이냐"

불쌍한 자식아 하고 외치고 나니 왕부인의 머리 속에 일찍 죽은 보옥의
형 가주가 떠올랐다.

"아이구, 불쌍한 가주야, 너라도 살아 있다면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지는
않으련만.

이제 네 동생마저 죽고 나면 난 어떻게 살라구.

아이구, 가주야"

왕부인의 입에서 가주의 이름이 나오자 가주의 아내인 이환이 덜썩
주저앉아 흐느껴 울고 가정도 고개를 돌린 채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가주만 아직 살아 있다면 가정이 보옥을 그렇게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가정은 보옥을 볼 적마다 문득문득 차라리 저놈이 죽고 가주가 살아
있다면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마치 보옥 때문에 가주가 죽기라도 한것처럼.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데 이번에는 대부인이 들이닥쳤다.

대부인은 실신해 있는 보옥을 보더니만 가정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애를 죽이려거든 나부터 죽여라!"

가정은 당황해 하며 무릎을 꿇고는 어머니 대부인에게 빌다시피 변명을
늘어놓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