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안다.
하는 일마다 중뿔나다.
놀이를 가도, 소주를 마셔도, 친구들 길흉사에 가도 별나게 걸다.
뼈지게도 모인다.
총동창회를 하면 제일 큰 테이블은 이들 것이다.
아이들 결혼이나 어른들 흉사에도 이들이 없으면 허전하다.
틈만 나면 만날 꺼리를 만든다.
바둑두자고, 산에 가자고, 요즘엔 손자 보았다고 모인다.
핑계가 없어 못모인다.
이렇게 자꾸 만나다가 생겨난 핑계 하나가 청암회다.
청암회.
고교시절의 푸른색 명찰에서 "청"을 따고 함께 다녔던 서울공대 뒷산의
불암산에서 "암"을 따서 이성규가 발의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세울이
흐를수록 듣기에 좋고 씹는 맛이 깊어지는 이름이다.
틈만 나면 만나다가 어느 순간부터 안사람들까지 함께 만나게 되어
청암회는 안팎으로 훈훈한 모임이 됐다.
친구들은 전화만 걸면 달려나와 점심을 같이하고 산에 오르고 골프를
치고 소주를 걸친다.
어느덧 지천명의 세월도 반을 넘겼건만 우리는 모두 현역이다.
여러모로 어려웠던 지난 30년간 우리나라 산업발전을 위해 뛰었던 그
모습 그대로 현장을 지키고 있다.
고맙게도 회원들은 한사람 빠짐없이 장자(조직의 리더)들이다.
그러다보니 번잡한 일상사를 접어두고 여유를 만끽할 처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여기에 얽매이지 않고 자적하며 지낸다.
전국 곳곳에 공장과 사무실을 갖고 있지만 생활의 빼어난 여유를 구가하는
구창용 (마바상사 사장), 생산의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도 철인
경기에서 우승을 놓치지 않았던 이름 그대로의 철인 박장영 (풍산금속
전무), 눈코뜰새없이 돌아가는 회사일 속에서도 친구들 일이라면 서슴없이
나서는 순수파 박찬규 (현대건설 부사장), 대기업 경영에 젊음을 바치고
이제 스스로 창업한 인간적 원칙주의자 이성규 (삼원정밀 사장), 외길
은행가의 생애에도 인생의 구석구석에 깊고 넓은 만능의 임병낙 (산업은행
수원지점장), 회사일에 아직도 코가 빠져 그것밖에 보이는 것이 없는
만년소년 조태제 (한양건설 상무), 일 빼면 남을 것이 없는, 그러나 친구들
일에는 한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않는 무덤덤이 경상도 사나이 장동립
(쌍용건설 부사장), 이제는 회사도 안정돼 자신보다 친구와 이웃을 돕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휴머니스트 황광웅 (건화엔지니어링 사장),
그리고 나 모두 아홉이다.
이밖에 이균학은 도로공사 기획실장으로 재직중 모든이들의 아쉬움 속에
근년에 작고했다.
또 김포공항 한모퉁이에 "조국에 드리는 탑"을 세워놓고 떠난뒤 LA에서
망향에 젖어 있는 김운해가 있다.
모두 남다른 경력과 능력을 갖추고 있고 인간미와 우정을 아는 넉넉한
사나이들이다.
모쪼록 건강을 누려 우정의 만남이 오래 계속되고 사회에 깊은 베품
남기길 바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