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능선 미래사회연구원회장(71.전경총부회장)은 고희를 넘긴 재계의
원로이자 산 증인이다.

대한상의 조사과장, 전경련 조사부장.사무국장.상무.경총 사무국장.전무
.부회장 등-.

40여년간 경제단체의 주요 요직을 거쳐온 그의 이력을 보면 적어도
그렇다.

그는 특히 80년부터 10년간 경총 부회장을 맡아 격동기 노사현장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노사문제 전문가의 위치를 확고히 다져온 그는 임.단협이 집중되는 요즘
각 기업에 특강하러 나가느라 한참 바쁘다.

김영삼 대통령이 ''신노사관계구상''을 발표한 이후 그의 ''주가''는 더욱
올라가고 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미래사회연구원에서 윤회장을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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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회장 = (첫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간밤엔 11시까지 전화가 끊이질
않는 바람에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가 "지성 3백인회"의 노사분과위원장을 맡고 있거든요.

회원들이 노동관계법이 개정되면 앞으로 국내 노사관계가 어떻게
되는거냐고 꼬치꼬치 물어와 답을 하느라고 그랬지요.

-신노사관계구상에 대해선 어떻게들 생각하던가요.

<> 윤회장 =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예요.

노사문제를 개별 사업장의 노사 당사자들만의 것에서 전국민적 관심사로
부상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평을 하더군요.

게중에는 이렇게 갑자기 뒤흔들어 놓으면 어쩌냐며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지만요.

나는 이게 순리대로 가는 것이라고 봐요.

앞으로는 경제발전 속도가 좀 더디더라도 근본부터 하나씩 바꾸어
나가야 할 겁니다.

예전에는 그저 달려가기 바빴었지요.

-"구상"이 실현될까요.

노동관계법 개정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전망도 있는데요.

<> 윤회장 = "순리"하고 "순탄"하고는 다릅니다.

노동법은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입을
위해선 어느 정도 손질이 필요한 상태고, ILO(국제노동기구) 권고도
있고하니 여건변화에 맞춰 법규를 고치는 게 순리라는 겁니다.

-과연 순리대로 될까요.

이번에도 복수노조 허용이나 제3자개입금지 조항 철폐 등 노동계쪽
요구만 반영되는 것 아니냐는 게 재계의 의구심입니다만.

<> 윤회장 = 그래서는 개정 의미가 없지요.

현행 노동법은 기업 입장에서 볼 땐 불리한 조항이 너무 많아요.

지난 89년 여소야대 국회에서 노동관계법이 개정되면서 근로기준법등
경영행위와 직결되는 개별 노사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뤄졌어요.

그냥 어물어물 넘어간 게 많다는 겁니다.

임금만 해도 그래요.

상여금에다 성과급 연월차수당 잔업수당 가족수당 체력단련비 등으로
나눠져 있기 때문에 국내 직장인치고 자기 월급이 정확히 얼마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급여체계로 어떻게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겠어요.

세계화하려면 외국인도 고용해야지 않습니까.

-그런 복잡한 문제 때문에 노동법이 단시일내에 개정되기는 어렵겠지요.

<> 윤회장 =노동법 개정은 단번에,단시일내에 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시간을 끌더라도 제대로 만들어야지요.

그런 점에서 다음달 구성될 노사관계개혁위원회는 정말 역사적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위원회에선 문민정부가 갖는 속성상의 단점을 극복해야지요.

인기 위주의 법개정은 안된다는 말입니다.

-기대만 할 게 아니라 경제단체 같은데서도 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윤회장 = 그렇습니다.

경제단체는 이제 자발적으로 일을 찾아 해야 합니다.

경영환경이 얼마나 바뀌었습니까.

시대변화를 미리 읽고 그 방향과 타이밍, 속도를 정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경제단체의 구성원들이 내부구조를 개선하고 심각하게
자체 반성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성은 경제단체만 할 것도 아니지요.

정치인이나 관료가 더 많이 자성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 윤회장 = 맞아요.

전경련 등 경제단체가 자기 색깔을 갖지 못했던 것은 우리 사회의
풍토와도 관련이 있다고 봐요.

우리는 "평론가 불재"의 사회 아닙니까.

소수의견과 반론을 용납못하는 풍토지요.

-물론 경제단체 내부의 문제도 많겠지요.

<> 윤회장 = 개인이나 단체가 다 소수의견을 내는 걸 두려워하는
풍조가 문제입입니다.

경제단체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지요.

회원사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데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는
항상 삐걱거렸지요.

과거 전경련에서 기업공개를 유도하는 자본시장 육성법을 논의할 때도
그랬어요.

일부 회원사들의 반대로 주먹싸움 직전까지 갔었지요.

당시 김용완회장이 중재해 다행히 무리없이 성사시켰지요.

-그렇게 보면 "평론가 불재" 사회에 문제가 있는게 아니라 "원로
불재"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과거에는 정주영현대회장 이병철삼성회장 김용완전경련회장등 세분이
합의하면 재계가 다 따라갔지 않습니까.

<> 윤회장 = 어른이 없다는 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예요.

세계적으로 원로가 없는 시대지요.

일본에도, 미국에도 없어요.

민주주의의 발전 때문인지도 모르죠.

어른이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기업가를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사라진게 더 안타까워요.

얼마전 대만에 갔더니 우리로 치면 경제부총리격인 경제부장이 "정주영
회장 같은 기업가를 빌려달라"고 농담을 하더군요.

이런 기업가들이 우리 경제를 여기까지 끌어올린 겁니다.

공업위주의 경제성장을 강조한 이병철삼성그룹 회장의 "공업우위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부존자원이 없는 나라니까 제조업을 해야 한다는게 이회장의
지론이었지요.

그걸 전경련이 받아들여 "실업을 하는 사람을 존중하자"는 걸 모토를
내걸었지요.

-지금 우리 사회야말로 바로 그런 비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61년 군사정권과 때를 같이해 설립된 전경련의 "61체제"가 지난번 비자금
사건을 계기로 이미 무너졌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경유착 시대가 끝났다는 얘기인데 뭔가 새로운 것을 지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 윤회장 = 얼마전 일본에서 도요다 경단련회장을 만났더니 21세기에
일본 경제계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모아 "비전 2020"을 마련했다고
하더군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발표도 했지요.

그런 작업을 우리도 해야 합니다.

-좋은 아이디어라도 갖고 계십니까.

<> 윤회장 = 나는 한국을 "매력적인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매력적인 나라는 부국강병을 통한 슈퍼파워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그저 세계사람들이 한번 가서 살고 싶고 뭔가를 배우고 싶다고 느끼는
나라, 그런 매력적인 나라를 만들면 족합니다.

일류 기업도 많고 국제적인 인물도 다수 배출하는 나라, 이를테면
스위스 같은 국가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저력과 잠재력을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금세기 들어 최빈국에서 이렇게 올라선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잖아요.

-어떻게 하면 매력적인 나라가 될 수 있을까요.

<> 윤회장 = 새로운 지식과 창의력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지역도 국내를 벗어나고 있잖아요.

실리콘밸리에 공장을 차릴 수도 있고 중국에서 사업을 벌일 수도 있지요.

70년대와는 전혀 다른 정신자세가 필요해졌어요.

60년대 중반부터 80년 이전까지 15년 정도 우리는 앞만 보고 뛰어
왔지요.

가진 기술이 없으니 모방만 하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지만 지금은
경영환경이 달라졌어요.

남하는 대로 하다간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방법이 문제겠지요.

<> 윤회장 =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교육밖에.

교육을 백년대계라고들 하지만 나는 지금부터 한 30년 정도는 바짝 교육에
매달려야 한다고 봅니다.

경제발전이 좀 더뎌져도 괜찮다고 봐요.

바닥부터 다져야 합니다.

-교육이라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얘기하는 건가요.

<> 윤회장 = 나는 지금의 교육이 너무 하향평준화됐다고 봐요.

영국에 가보니 "교육은 어려운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고들 생각하고
있더군요.

예를 들어 라틴어 대수 로그 등 어려운 것을 가르치면 쉬운 것은
자연히 해결된다는 논리지요.

우리는 한자가 어렵다고 그 비중을 자꾸 줄이고 있는 데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세대간 충돌도 결국 한자세대와 한글세대의
마찰 아닙니까.

최소한 신문을 읽을 정도로는 한자를 가르쳐야 해요.

한글은 인푸트( input )는 쉽고 아웃프트( output )는 어렵지만 한자는
그 반대예요.

한자는 배우기는 어렵지만 그것을 사용할 때는 효과가 엄청나다는
뜻이지요.

학자라는 사람도 결국 어려운 것을 더 어렵게 만드는 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한자를 집어치우는 겁니까.

-강연할 때도 교육이야기를 하십니까.

<> 윤회장 = 물론이죠.

질서를 제대로 지키고 정직해야 한다는 원칙론을 주로 강조하고 있어요.

일전에 셋째딸과 외손주를 데리고 식당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손주녀석이 밥은 안먹고 식당안을 헤집고 다니며 떠들길래 불러다
야단쳤더니 내 딸이 "아버지, 애 기죽이지 마세요"라고 말하더군요.

나중에 집에 와서 한바탕 혼을 내줬지요.

정직해야 자신이 있고 질서를 지켜야 당당한 것이라고요.

개인이나 기업이나 이 원칙이 매우 중요하다고 느껴 자주 이 얘기를
하고 있어요.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으시다면서요.

<> 윤회장 = 일단 끝은 냈는데 아직 80년대 이후 얘기는 손도 안댔어요.

주로 50년대 상공회의소 시절 얘기를 썼지요.

선배들이 대부분 고인이 됐고 50년대를 아는 후배들이 없어서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서였지요.

회고록을 쓰다보니 정말 우리 경제의 황금시대는 70년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쁜 일도 적잖았고 좋은 일도 많았지요.

그때는 정말 미국으로 치면 "골든 식스티스"( Golden Sixties )였거든요.

<대담 = 유화선 산업 1부장 부국장대우>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