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에서 가장 넓은 국토를 자랑하는 인도네시아.

이 인도네시아는 한국기업들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지난 68년 한국기업이 처음 해외에 진출한 곳이 이 나라다.

또 지난 94년까지만해도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해외투자대상국이었다.

그 결과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활동중인 한국기업은 300여개에 이르고
있고 수도 자카르타에만도 1만여명의 한국인이 거주하면서 동남아에서
가장 큰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인이 흔한 인도네시아에서도 "이승민"(51)이라는 이름과
그가 운영하는 봉제회사 "로킨도 라야"사를 모르는 한국인은 별로 없다.

한국인뿐 아니라 현지정부관리들도 " PAK YI"(이사장의 현지식 이름)
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인다.

인도네시아정부가 한창 외국인투자유치에 시동을 걸기 시작한 80년대
중반 현지정부를 도와 한국기업의 투자유치에 앞장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자 등을 제조, 유럽 등에 전량 수출함으로써 인도네시아에 연간
500만달러의 외화를 벌어주는 공로자이기도 하다.

이사장이 태어난 곳은 서남해안의 작은 섬 율도.

목포에서 다시 배타고 들어가야 하는 낙도였다.

초등학교 분교조차 없는 이곳에서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자라난
이사장은 고학으로 대학(외국어대 말레이-인니어과)을 마친 후 71년
동화기업이라는 목재회사에 입사한다.

그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인도네시아 현지합작법인 선발대.

인도네시아에서의 생활은 칼리만탄 섬의 원목벌채 현장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만해도 현지에 진출한 한국기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숱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현지 정부의 허가없이 중요한 장비를 반입했다가 손해를 보는 일 같은
행정상의 시행착오는 다반사였다.

더 큰 문제는 현지인들과의 의식차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이었다.

한번은 운전기사가 근무시간중 낮잠을 자길래 잔소리를 했더니 몸둥이를
들고 덤벼들어 혼이 났다.

또 야간에 근무지를 이탈한 이유로 해고당한 경비원이 흉기를 들고
사무실에 침입해 행패를 부린 적도 있다"이사장이 주마등처럼 떠올리는
고생담이다.

이사장을 괴롭힌 것은 현지인들과의 갈등만이 아니었다.

척박한 생활환경과 낯선 기후에서 오는 질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열대우림인 칼리만탄의 산판에는 모기가 들끓었고 홍수때면 흙탕물을
길어다가 목욕 세탁은 물론 취사까지 해결해야 했다.

어느해인가는 열대 말라리아병에 걸려 고생을 했고 그 다음해에는 몸에
온통 빨간 반점이 생기는 모스크바 독감에 걸렸었다.

또 계속해서 고온다습 지역에서 생활하다보니 기관지염이 떠나질 않았다.

이런 고생중에서도 이사장은 현지인과 친해지기 위해 신고 있던 구두도
벗어주고 틈만나면 같이 놀러다니는 등 각별히 노력했다.

"문화의 벽을 허무는 것만이 현지에 기반을 굳히는 첩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5년반 동안의 산판근무를 마치고 떠나올 때는 회사
안팎의 현지인들이 석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글썽일 만큼 끈끈한
인간관계가 형성됐다.

산판생활을 마치고 자카르타에서 몇해를 근무하다보니 이제는 자신의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인도네시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지 11년반만에 그동안 근무해온
동화기업을 그만두고 현지인과 합작으로 합판용 접착테이프 공장을 세웠다.

그러나 이사장의 첫사업은 출발부터가 순탄치 못했다.

초기운영자금을 빌리기 위해 은행에 융자수속을 다 마친 상태에서 갑자기
환율인상조치로 은행이 문을 닫아버린 것.

다행히 인도네시아는 금융시장이 개방돼 있어 가까스로 독일의 한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공장을 가동할 수 있었고 이듬해부터는 이익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시작한 지 3년째 되는 해에는 자금상태도 양호해졌으나 이번에는
동업자가 속을 썩이기 시작했다.

회사형편이 나아지자 현지인 동업자가 걸핏하면 공금을 빼내고 나중에는
회사명의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다른 사업을 벌이기까지 했다.

수차에 걸쳐 중지를 요구하고 부당한 융자금 상환을 독촉했으나 계속
자금을 빼내가는 바람에 회사는 자금압박에 시달리게 됐다.

동업자가 이처럼 제멋대로 행동할수 있었던 것은 이사장이 외국인 신분이기
때문이었다.

창업절차의 편의상 이사장은 주주나 임원으로 등재를 안하고 전적으로
파트너명의로 회사를 설립한 것이 큰 실수였다.

결국 동업자와 갈라선 이사장이 새로 손을 댄 사업은 봉제공장이었다.

88년초 이 공장을 세우면서 이사장은 현지에 진출해 있던 모국의 한
기업으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얻어 아직도 그 회사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사장은 당초 자체공장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에 공장건축을 준비중이었는데
오더를 주기로 한 S상사에서 재고해 볼 것을 권유한 것.

"공장건물을 지었다가 충분한 물량을 수출하지 못한 채 쿼터문제가
발생하면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니 공장건축을 중단하고 대신 건물을 임차해서 최단시간내에 공장을
가동해 쿼터확보에 주력하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였다.

이같은 조언이 그대로 적중,그로부터 2년후 쿼터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사장의 회사는 한국계 회사중 가장 많은 양의 쿼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사장이 회사를 세우고 운영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일은 직원채용과
노무관리였다.

산판생활을 통해 현지근로자들을 관리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체득했기 때문이었다.

88년 공장가동을 앞두고 실시한 직원모집때는 지원자 한사람 한사람을
직접 면담해 채용여부를 결정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2주동안 매일 150명을 면접한 끝에 300여명의
직원과 편직기 170대로 가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렇게 신경을 썼음에도 견습기간 3개월중에 약40%가 적응을
못하고 퇴직했다.

이 과정을 거쳐 인력이 안정되는 데는 1년여의 시간이 소요됐다.

이사장은 지금도 회사경영중 노무관리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가 노무관리에서 강조하는 비법은 다름아닌 "대화"다.

이사장 본인이 종업원과 자주 대화를 가져 인화를 도모하는데 주력하고
있고 다른 한국인 직원들에게도 종업원들과 많은 대화를 가질 것을 요구
한다.

특히 업무지시나 공고사항도 부득이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구두로
처리토록 하고 있다.

"잘못을 저지르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직원이 있더라도 절대 동료들
앞에서는 야단을 치지않고 따로 불러 조용히 타이르는 방법으로 관리를
한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유달리 민족적 자존심이 강하고 외국인에 배타적이므로
이런 감정을 배려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게 이사장의 설명이다.

덕분에 이사장의 로킨도 라야사는 많은 한국기업들이 격렬한 노사분규로
현지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와중에서도 지금까지 단 한 건의 노사마찰없이
마치 옛날 농가의 대가족처럼 화목하게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이같이 안정된 노사관계가 밑받침이 돼 회사는 고속성장을 거듭,
지금은 927명의 종업원에 연간 5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사장은 또 인도네시아 정부의 한국기업유치활동에도 열성적으로 협조
하고 있다.

80년대 후반 외자유치에 드라이브를 건 인도네시아 정부는 한국과
인도네시아 양쪽 사정을 다 잘 알고 있는 이사장에게 가교역할을 부탁했고
이사장은 망설임없이 기꺼이 응했다.

"일할 자리를 줘서 가난을 면하게 해준 제2의 고향 인도네시아에게 조금
이라도 보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를 계기로 이사장은 88년부터 매년 인도네시아 정부의 대한투자유치단의
일원으로 한국에서 투자환경설명회를 갖고 한국기업의 인도네시아 진출을
조언하고 있다.

또 투자환경 조사차 현지를 방문한 한국기업인들에게도 지난 20여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현지의 법규나 노사문제 상관행 등에 관해 자문해주고
있는데 지금까지 이사장에게 전수를 받은 기업만도 150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조물주가 남자에게 준 가장 큰 축복은 기력이 있는 날까지 열심히 일하게
하신 것"이라는 인생관을 갖고 있는 이사장.

그 인생관대로 이사장은 지금까지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수출
뿐만아니라 2억인구의 내수시장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