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동에서 1백평규모의 수퍼마켓을 운영하는 서성호씨는 지난해 7천8백원
에 매입했던 삼양김치라면 한 상자를 올해부터 7천원에 사들이고 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인근 중소 소매상 35명과 함께 협의회를 구성, 공동
구매를 했기 때문이다.

서씨는 "현재 라면 화장지 세제등 40여품목을 공동구매하고 있다"며
"구매량이 많아지니 구매단가가 낮아질 뿐만 아니라 제조업체가 공짜로 주는
덤도 많이 들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상품을 대상으로 깜짝세일을 실시, 주부고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중소영세상인들이 "협업화"에 가장 관심을 쏟아붓는 것은 당장 구매단가를
낮출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다.

개별 소매상들의 구매력은 미미하지만 뭉치면 대형업체 이상의 구매력을
행사할 수 있어 그만큼 구매단가를 낮출수 있다.

서씨의 경우와 같이 지역별로 소매상들이 결성한 자생협의회들이 최근
잇따라 생겨나고 있다.

유통시장이 개방된 올해부터 이같은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각 지역마다 존재하던 상조회 상우회들이 단순한 친목모임에서
벗어나 공동구매사업에 적극 나서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러나 국내 중소영세상인들의 협업화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공동구매가 이루어지더라도 몇몇 품목에 그치고 있다.

중소영세상들이 조직적으로 공동구매를 하기에는 걸림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천광역시 수퍼마켓협동조합의 이원재이사장은 공동구매사업전개에서
겪게되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자금부족"을 꼽는다.

"당장 현금이 없으니 제조업체 거래선을 개척하는데 애로가 많습니다.
구두계약만으로 싼 값에 물건을 빼내기가 쉽지 않은데다 구매단가를 낮추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이사장은 "임의단체인 상인모임이 돈없이 신용거래를 하기가 쉽지 않다"
고 말하고 있다.

각 지방마다 들어서있는 제조업체 대리점과의 갈등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제조업체 대리점들은 소매상들에 본사 제품을 공급하는 도매상이다.

제조업체를 직접 상대해 저가로 제품을 대량구매하려는 조합들은
"눈엣가시"일수 밖에 없다.

제일제당 농심 미원 삼양식품등 제조업체들은 자사 대리점들로부터 상인
조합이나 협의회에 제품을 직접 공급하지 말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우리 판매량을 조합들이 갉아 먹는다"는게 대리점의 주장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조합이 제조업체로부터 물건을 공급받기가 결코 쉽지
않다.

대리점들의 반발을 이겨내고 공동구매를 하려고 해도 제품을 보관할만한
물류창고가 거의 없다.

자영수퍼마켓의 연합체인 한국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는 유일하게 전국적
조직규모를 갖춘 단체다.

전국 4천여개의 자영수퍼마켓들로 구성된 연합회가 확보한 물류창고는
4개(1천평이상)에 불과하다.

각 지역조합마다 1백평 남짓한 임대창고를 하나씩 갖고 있는게 고작이다.

서울 서부수퍼마켓 협동조합 박흥수상무는 "공동구매를 하려면 물건을
쌓아두고 배송할 물류센터가 필요합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공동구매한
제품을 점포로 나누어 주는게 불가능한 일입니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물류센터를 확보하지 못하면 대규모 공동구매사업을 하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상인들의 조직화 협업화를 저해하는 다른 암초는 무자료상품.

청량리에서 30평규모의 수퍼를 운영하는 박씨는 얼마전 포카리스웨트 한
상자를 "나카마"(무자료거래상)로부터 9천원에 들여놓았다.

박씨가 속해 있는 지역상인협동조합에서 공동구매하는 포카리스웨트 한
상자의 가격은 9천4백원.

박씨는 "보통 조합 제품을 사지만 무자료상품이 돌 때면 아무래도 값이 싼
쪽으로 기울게 된다"고 털어놨다.

상인들이 무자료쪽으로 자꾸 빠져 나갈수록 조합 공동구매물량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품목이 늘어나고 거래선이 많아질수록 구매조건도 좋아지게 되지만 당장은
싼 무자료상품을 사는게 오히려 낫다.

대형업체에 맞서기 위해서는 공동구매를 더욱 확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장 눈앞의 이익을 좇는 상인들의 행태가 어찌보면 협업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