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들이 정권을 향한 큰 "시장"을 현란하게
펼쳐놓고 있다.

서로 자기당의 정책이 최고라며 그럴듯한 메뉴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좌판에 진열된 공약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경제적 차원이나
수치개념만 잔뜩 나열돼 있다.

이 나라의 중요한 문화정책에 대해서는 어느 정당이나 정치인도
맛깔스런 메뉴를 내놓지 않고 있다.

문화민족임을 자타가 공인하면서도 이 나라 심부에서 가장 큰병을
앓고있는 문화정책분야를 여전히 불모지로 던져두려는 양상은 실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다.

한국병이라는 가장 심각한 정신문화의 병은 제쳐두고 각 정당들은
정권욕에만 급급해 있는것 같다.

처음엔 그나마 비아냥대는 정도이던 싸움이 급기야 욕설과 지역간
헐뜯기, 증오에 찬 비방전으로 확산되고 있다.

국민들이 기대했던 훌륭한 정책대결은 끝내 볼수가 없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앞선다.

이렇게 되면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는 커녕 정치인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마저도 앗아가는 것이다.

이같은 한심한 정치문화의 작태가 현대 한국정치사 반세기동안 끈질기게
전수돼온 유산인가 하는 우려를 다시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정책빈곤을 드러낸다 해도 어느정도에 그쳐야 지켜볼 맛이 나는게
아닐까.

가시적인 개혁이나 세계화작업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위대한 한민족의
얼을 알맹이로 한 문화정책이나 의식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만방에 한국의 위상을 높여가야 한다.

이 노력은 정책을 위한 정책만으로도 안되고 내용없는 세계화 구호만
으로 되는것도 아니다.

어떤 비전이든간에 그 안에는 우리민족의 끈질긴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

민족의 얼이 담겨 있는 문화유산을 빛낼 국가의 문화정책이야말로
가장 값진 "메뉴"인 것이다.

정신문화는 한 국가의 가치관이고 자존심이다.

훌륭한 문화정책은 국가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정치인들이 한결같이 우리 역사에 담겨 있는 훌륭한 정신문화예술에
문외한적인 시각만을 드러내고 있는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문화발전이 없는 경제발전은 미래를 약속하기 어렵다.

이 나라엔 언제쯤 훌륭한 문화정책이 나올수 있을까.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에서는 문화정책 예산을 첨단 산업과 국방 예산
다음으로 크게 잡고 있다.

문화 정책이란 제도적으로 확고하게 정립이 돼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화부를 독립시키지 못하고 문체부라는 곁방살이 식으로 꾸려가고
있는 현재의 정책으로는 우리 문화수준을 높일수 없을 뿐더러 세계화는
더욱 어렵다.

올해를 문학의 해로 정해놓고 있지만 문인들의 창작의욕과 독자들의
문학향수 욕구를 뒷받침해 줄수 있는 문예진흥정책은 미약하기 짝이
없는 실정이다.

요즘 독도 문제로 우리를 숫제 깔보고 있는 일본만 해도 그들은
경제수준 뿐만 아니라 문화수준까지 세계정상에 서 있다고 자부한다.

사실 그네들이야말로 일찍이 우리의 많은 문화유산을 노략질해 갔으며
우리 선조들의 맑은 정신세계를 탐닉해갔던 것이다.

문화수준은 곧 그 나라의 위상을 대변한다.

미국의 수많은 빌딩을 두고 드골은 "미국 졸부들의 빌딩 하나가 위대한
프랑스 문화유적지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 하나만큼 큰 가치가 있겠는가"
라고 했다.

과연 드골의 콧대가 단순히 그의 정치철학에서만 나왔을까.

이는 정치열풍에 휩싸인 우리에게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