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하녀편에 시를 앵앵하게 보낸 장생은 과연 어떤 답장이
있을지 조마조마하여 하루 종일 안정부절 못하였다.

저녁 무렵이 되어 하녀가 앵앵이 쓴 답장을 들고 장생을 찾아왔다.

그 편지를 펼쳐들면서 장생이 얼마나 긴장을 하였던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장생이 그랬던 것처럼 시가 한 수 적혀 있었다.

시의 제목은 "명월삼오야"였다.

서쪽 초당에서 달 뜰기를 기다려
바람이 건드린 듯 문을 반쯤 열어놓네
저기 담장 너머 꽃그림자 흔들리니
날 찾아오는 낭군인가 가슴 설레네

이 시는 밤중에 몰래 방문을 열어놓고 초대하는 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장생은 너무 기쁜 나머지 하녀를 덥석 껴안을 뻔 하였다.

장생은 명월, 그러니까 보름달이 뜨기까지 사흘을 더 기다리는데
애간장이 타는 것만 같았다.

왜 이리 해가 늦게 또고 또 느리게 하늘을 지나가는가.

마침내 보름이 되어 장생은 시에 적혀 있는 대로 정씨 부인 집 서쪽
초당 근방으로 가서 담장을 뛰어 넘을 만한 데가 없는가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근처에는 없고 동쪽 담장 바로 옆에 살구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 나무에 올라 뛰어내리면 담장을 넘을수 있을 것 같았다.

장생은 조심조심 나뭇가지를 잡고 올라가 담장 안으로 사뿐히 뛰어
내렸다.

뜨락의 숲 그늘에 몸을 숨겨가며 서쪽 초당으로 다가가니 과연 방문이
반쯤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장생은 심장이 뛰는 소리가 천지에 우리고 있는 것만 같아 두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한걸음 한걸음 그 방문으로 다가갔다.

장생이 열린 방을 틈으로 들여다보니 앵앵은 보이지 않고 장생의
심부름을 해주었던 홍랑이라는 하녀가 흐트러진 자세로 잠이 들어
있었다.

"홍랑아, 홍랑아"

장생이 소리를 죽여 가만히 홍랑을 부르니 홍랑이 엉겁결에 눈을 뜨고
장생을 쳐다보고는 기겁을 하였다.

"이 밤중에 어쩐 일이세요?"

"아가씨 편지에 오라고 해서 왔으나 아무 염려말고 가서 알려드리기나
하여라"

홍랑이 안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잠시 후 앵앵이 나왔다.

그러나 홍랑은 자기 방을 비워주고 다른 데로 가버렸다.

장생은 눈이 부신 듯 앵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앵앵은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있었는데 그 얼굴 표정이 이상하였다.

장생을 반기는 기색은 하나도 없고 차가운 기운이 돌 정도로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