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 책이 뭐예요?"

대옥이 평평한 돌 위에 쌓인 꽃잎들을 쓸어모으다가 꽃잎들에 묻혀
있던 책이 드러나자 책을 집어들며 물었다.

"아, 그거? 아, 아무것도 아니야"

보옥이 당황해 하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것도 아니라니요? 이렇게 글자들도 또박또박하게 찍혀 있는데.
가만 있자, "서상기"? 어디서 많이 듣던 제목인데"

대옥이 벌써 책을 펼쳐들고 읽을 채비를 하였다.

보옥이 얼른 대옥에게서 책을 뺏어들며 소리를 죽여 말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만약 아버지가
아는 날에는 줄초상이 날테니까"

"줄초상?"

"그래. 나하고 명연이"

"오라, 명연이 녀석이 이 책을 보옥 오빠에게 갖다줬구나.

알았어요.

그대신 이 책을 나에게 보여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요.

보옥 오빠 혼자만 보고 나한테는 보여주지 않는 날에는 그냥 막 소문을
낼 거예요"

대옥이 유리한 고지에 서 있다는 듯 어깨를 움찔거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알았어. 아직 내가 다 못 보았지만 대옥 누이가 먼저 읽도록 해줄게.
이 책 가지고 가서 아무도 몰래 읽고 돌려줘야 해"

대옥이 책을 받아 들고는 싱글벙글 입을 다물줄 몰랐다.

대옥은 보옥과 헤어져 혼자 자기 방이 있는 소상관으로 향했다.

이향원 담장 밑을 지나는데 담장 안에서 피리소리에 맞춰 부르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기도 하고 독창을 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극단의 배우들이 연극 연습을 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저 그런 노래려니 하고 지나가는데 한 노래 가사가 마음을 때리듯이
와 닿았다.

꽃같이 아리따운 그대의 모습 세월은 물같이 흘러만 가네 아리따운
모습과 흘러가는 세월이 묘하게 대비되는 가사였다.

아무리 아리따운 모습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아닌가.

어느새 눈가에 주름이 찾아왔는가 싶으면 벌써 자분치에 백발이
찾아들고. 문득 대옥의 눈앞에 보옥이 버린 꽃잎들이 물에 떠내려가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 꽃잎들은 바로 흐르는 세월에 속절없이 떠밀려가는 인생, 혹은
청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떤 사연이 있길래 저런 가사가 불리는 것일까.

대옥은 지금 배우들이 연습하고 있는 연극 내용이 궁금해지기도 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