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송년모임은 25주년 기념모임이었다.

어떻게 진행할까?

회장인사, 재무보고, 그리고 늦은 나이이나 재미있는 놀이가 없을까?

고민 끝에 임원선임은 제비뽑기로 하고, 이어서 <>안에 글자넣기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대화를 갖기로 했다.

시집 등에서 따고, 짜깁기로 문장을 만들어 숙제를 송부했다.

"안녕하십니까?

벌써 또 한해가 갑니다.

이제는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하기도 <><><><><>.

진솔하게 뒤돌아보며, 자신을 생각하며, 물어보며, 거울 앞에 서기가
<><><><><>요.

그래도 작은 소망이 한줄기 빛으로 뿌리를 내리게 꾸밈없는 진실된 삶을
<><><><><>요라고 하면서.

위 <><><><><>에 글자(5자씩)를 넣어 만나는 날 가지고 오시면 심사 후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매월 서울종로에 있는 비엔나에서 만나 무교동에서 회포를 풀고,
봄.가을로 각회원 전식구가 명산을 찾아 여행을 다니곤 한다.

이날은 식순대로 늘 난항이었던 임원선임을 순식간에 제비뽑기로 결정,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안에 5자씩 쓰기는 미리 숙제를 주었고 짝궁과 함께 50세가 다
넘었는데도 아직도 파란신호등만 보이는지 상당 시간이 걸려서도 1백점
만점에 최고 40점, 그리고 그 이하 점수들이었다.

해마다 각회원 전식구가 모였으나, 점점 자녀들이 커가면서 이제는
짝궁끼리만 모이게 됐고, 대화의 주제도 부모님.자녀진학에서 군입대로,
이번에는 혼사얘기로 열띤 토론이 계속됐다.

곧 들이닥칠 일이긴 해도, 아예 우리들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우리들 모임인데! 내세울 것 없는 멋없는 모임! 집에 들어가서도 따로
누워 밤잠을 설쳤겠지.

우리 회원은 구상랑카(주)회장 김창만, 미국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김종신, (주)티케이트 상무이사 송영일, 홀로된 권성자, 묵진독서 대표
홍순길, 경일군장사 대표 최용호, 부산 세관장 박광수, (주)한성 총무부장
조철웅, 목사 김영국, 그리고 항상 만족함 속에 사는 필자다.

대학에서 한때 이발도 안하고 고시공부하다(박세관장은 빼고) 왠지 그때
바람이 불지 않아 후회없이 흩어져 버린 후, 다른 길들을 가다가 70년7월
12일(필자나이 28세) 묵묵히 살아가자는 합의하에 묵진회에 다시 모인
연세대 행정학과 4회 동문이다.

금년에도 부끄럽군요, 어떠하신지요.

그래도 살아가야죠.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