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은 잔 글씨로 "거협편" 뒤에다가 우선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었다.

"꽃을 불사르고 사향을 없애버려야만 비로소 규방에서 충고를 하는 일이
없어지리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규방 여자들이 꽃으로 방을 꾸미고 사향으로 몸치장을 하고는 한껏
자태를 뽐내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충고를 하며 간섭을 하려 드는데,
꽃을 불사르고 사향을 없애어 그 자태를 초라하게 만들면 잘난 척하지
못할 것이요, 다른 사람에게 섣불리 충고하는 일도 없을 것이 아닌가 하는
뜻이리라.

지금 습인의 충고 내지는 핀잔으로 마음이 상해 있는 보옥으로서는
여자들의 간섭이라는 것이 여간 귀찮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 다음 보옥은 보채와 대옥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고 갈등에 빠졌던
일들을 떠올리며 글을 지어 적어나갔다.

"보채의 아리따운 자태를 없애고 대옥의 영특함을 재로 만들어버리면
규방에서 추하고 아름다운 것의 차이가 없어지리라.

다시 말해 아리따운 자태를 없애면 그 자태를 연모하는 마음이 없어질
것이요, 영특함을 재로 만들어버리면 그 총명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어질
것이니 그렇게 되면 그녀들도 추한 여자와 별 다를바 없게 될 것이
아닌가"

정말이지 보옥은 어떤 때는 보채와 대옥이 평범한 여자들이라면 이렇게
마음 고생을 하지는 않을텐데 하고 생각한 적이 종종 있기도 하였다.

어쩌면 보채와 대옥은 그물을 치고 함정을 파고는 남자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눈을 어둡게 하는 요물들인지도 몰랐다.

거기에 습인과 사월도 포함될 것이었다.

보옥은 이런 내용의 문구도 한줄 적어넣었다.

이렇게 "거협편"의 표현을 본떠 자기 마음을 읊고 나니 한결 홀가분
해지는 기분이었다.

여자들의 간섭이 주는 억압감과 여자들에 대한 정념으로 인한 괴로움에서
벗어난 느낌이기도 했다.

좀 거칠게 표현하면 여자들의 옷을 훌렁 벗겨 그 가식을 폭로한 듯한
통쾌함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보옥은 붓을 던지고는 껄껄 웃으며 잠자리에 들어 곧장 잠으로 굴러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습인이 옷을 입은채 보옥의 바로 옆 이불 위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보옥이 살그머니 이불을 빠져나와 습인을 흔들어 깨웠다.

"감기가 또 들면 어떡하려고 이렇게 이불도 안 덮고 자는 거야"

그러면서 보옥이 습인의 옷을 벗겨주려고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