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인이 보옥이 잡고 있는 소매를 넌지시 거두며 세번째 조건을 말했다.

"계집애들과 어울려서 연지나 분을 가지고 놀지 마세요.

그리고 도련님은 계집애들 얼굴에 발려 있는 연지에 입을 갖다 대는
버릇이 있는데, 연지가 입으로 들어가면 독이 되어 위험하단 말이에요.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알았어. 그런 버릇도 고칠게. 그 다음은 또 뭐야?"

"도사나 중을 욕하지 말고 천한 붉은 색을 좋하아지 말고. 그 정도만
하죠.

이 몇가지 조건만 들어주신다면 누가 팔인교를 메고 와서 저를 데려가려
해도 전 이 집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습인은 처음부터 영국부에서 나가지 않으리라 작정을 했으면서도 나가게
될 것처럼 연극을 꾸며 결국 보옥의 몇가지 나쁜 버릇들을 고쳐놓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보옥의 그런 버릇들이 고쳐질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습인이 잘 시간이 되었다면서 침대를 빠져나와 보옥의 이불을 한번
더 다독거려주고는 시녀들의 방으로 건너갔다.

이튿날 아침 습인은 온몸에 열이 펄펄 끓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어제 바깥 찬바람을 많이 쐬어서 감기가 든 모양이었다.

보옥이 대부인에게 말하여 의원을 불러오도록 해서 습인을 위해 진맥을
하고 약을 짓게 하였다.

습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약을 마시자 보옥이 습인을 도로 눕히며
이불을 여며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는 보옥이 대옥의 방으로 가보았다.

시녀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대옥 혼자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보옥이 대옥을 흔들어 깨우자 대옥이 잠을 깨웠다고 투정을 부렸다.

"아이, 남 낮잠 좀 자려는데 이렇게 와서 귀찮게 하면 어떡해요?

잠시 다른데 가서 놀다가 와요"

"날더러 어디로 나가란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지겨워"

그 말에 대옥이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정 이 방에 있고 싶으면 저쪽에 가서 얌전하게 앉아 있어요"

보옥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아, 나도 잠이 와"

엄살을 부리며 슬그머니 대옥의 침대 위로 올라오려 했다.

대옥이 톡 쏘듯이 말했다.

"베개도 없잖아요"

"같이 베지 뭐"

"안 돼요. 여기 누우려면 다른 베개를 가지고 와요"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