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가진 대감댁으로 연극구경을 가고 습인의 집에 놀러가고 하는
동안 보옥의 방에 남은 시녀들은 오랜만에 제 세상을 만난 기분이었다.

"야,우리 바둑 두자"

"쌍륙을 굴리자"

"골패놀이가 더 좋아"

어수선하게 떠들다가 시녀들이 세 패 정도로 나뉘어 자기들이 하고
싶은 놀이에 빠져들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수박씨들을 한줌씩 입에 털어넣어 씹어먹으면서
놀이를 하였다.

방바닥에는 여기 저기 수박씨 껍질들이 어지러이 널리게 되었다.

마침 이때 보옥의 유모 이노파가 지팡이를 짚고 보옥의 방으로 와
보고 기겁을 하였다.

"아니, 이게 무슨 난리들이야.

도련님 방을 너희들이 이렇게 어질러놓아도 되는 거야?

내가 자주 와보지 않았더니만 엉망진창이군"

이노파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무라도 시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노파는 이제 이 집에서 살지 않고 다른 집에서 은거하고 있는
처지이므로 사실 시녀들을 감독할 권한은 없는 셈이었다.

그런데도 자꾸 잔소리를 늘어놓자 한 시녀가 신경질를 부렸다.

"아니, 이 늙은이가 왜 이리 귀찮게 구는 거야?

방이 좀 어질러졌으면 보옥 도련님 오기전에 우리가 치워놓으면 될거
아냐.

제발 상관말고 나가달라구"

그러자 이노파는 조금 주춤해져 어디 먹을 거라도 없나 하고 두리번
거렸다.

그러다가 탁자위에 놓인 수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수락은 설탕을 넣어 만든 우유와 같은 종류의 궁중요리로 후비
원춘이 보옥에게 인편으로 보내준 것이었다.

보옥은 그것을 얼만큼 맛있게 먹고 나서 나머지는 습인이 자기집에
갔다가 돌아오면 먹으라고 남겨둔 것이었다.

보옥은 습인이 수락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야단스런 시녀들도 보옥이 습인을 위해 남겨둔 수락에는
손을 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노파가 슬그머니 탁자로 다가가더니 숟가락을 집어들고
수락을 떠먹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시녀가 고함을 질렀다.

"그거 먹으면 안돼요.

보옥 도련님이 습인의 몫으로 남겨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없어지면 도련님은 우리들이 먹었다고 의심할거 아니에요?"

그러자 이노파는 더욱 게걸스럽게 수락을 퍼먹으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내가 어떻게 키운 보옥 도련님인데, 그 도련님이 나보다 습인이를
더 귀하게 여긴단 말이야.

이 수락 한그릇 먹었다고 화를 낼 도련님이 아니지"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