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업인] 하야시 히로코 <일본 샤르레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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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이라구요? 무모하리만큼 물고 늘어지는데는 자신있습니다"
일본 제 3위 여성용 란제리업체 샤르레의 하야시 히로코 신임사장의
자기분석이다.
뒤늦게 뛰어든 샤르레가 와코루와 세시르라는 거대산맥을 넘볼수 있을 만큼
성장한 이면에는 하야시 마사하루 샤르레회장의 아내 히로코사장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결혼 2년째의 단꿈에 젖어있던 히로코사장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지난
64년.
남편이 돌연 탈샐러리맨을 선언하고 나섰고 이후 10여년동안 남편의 전직이
14번이나 계속됐다.
히로코사장의 잠자고 있던 장사꾼기질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독특한
판매시스템을 동원하고 있는 한 세제업체를 발견, 남편에게 취직을 권유
하면서부터이다.
홈파티형식의 시험사용설명회를 열면서 판매하는 이 회사는 대리점형태로
운영됐다.
총액 1만엔이상의 상품을 사면 "메이트"라는 회원자격이 주어져 15% 인하된
가격에 물건구입이 가능하기때문에 메이트는 이회사의 상품을 가져다
특약점이나 대리점형식을 빌려 비즈니스를 할 수 있었다.
샤르레의 창업은 이 세제회사의 대리점을 운영하던 남편이 친구의 부탁을
받아 란제리를 끼워 판 것이 본부에 알려져 해고당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앞서의 판매시스템을 활용, 샤르레는 급속도로 점유율을 넓혀갈수 있었다.
물론 순조롭기만 한것은 아니었다.
창업 3년째인 지난 77년 전체매출의 30%를 차지하던 고베의 대리점이 다른
회사의 상품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다른 대리점으로부터 클레임이 들어왔고 회사의 신뢰성이
곤두박질쳤다.
눈물을 머금고 반기를 든 대리점을 잘라내버린 하야시내외는 나란히 삭발을
한다.
이것이 종업원의 사기를 높이는데 한몫했고 자연히 매출도 한해전의 두배로
끌어올릴수 있었다.
샤르레가 결정적으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게 된 계기는 지난 79년
찾아왔다.
란제리디자이너이면서 직접 생산공장도 운영하던 호리에쇼지를 소개받게된
것.
그는 첫대면에 다짜고짜 "브래지어 착용하고 있나요"라고 물었다.
히로코사장이 멋쩍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에는 제대로 된 브래지어가 없어요. 지금 파는 것은 모유띠 정도에
불과합니다"
히로코사장은 공감했다.
실제로 일본 란제리업계는 디자인위주 일색으로 출산후 체형이 변한
주부들을 겨냥한 제품은 없었다.
히로코사장은 샤르레의 표적대상을 30~40대주부로 잡고 호리에쇼지에게
"제대로된 브래지어제작"을 의뢰했다.
소재개발에 1년반, 디자인에 반년을 투자, 완성된 상품은 판매 2년만인
83년 연간 50만개씩이나 팔려나갔다.
이듬해부터는 매년 100만개이상의 판매를 지속,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최고히트상품이 됐다.
"창업초기 독점시장 진출은 자살행위라며 뜯어말리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뚫고 들어갈 틈새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창업 21주년이 되는 내년부터는 피부마사지및 신발수리등의 신규사업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히로코사장의 열정은 식을줄을 모른다.
< 김지희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1일자).
일본 제 3위 여성용 란제리업체 샤르레의 하야시 히로코 신임사장의
자기분석이다.
뒤늦게 뛰어든 샤르레가 와코루와 세시르라는 거대산맥을 넘볼수 있을 만큼
성장한 이면에는 하야시 마사하루 샤르레회장의 아내 히로코사장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결혼 2년째의 단꿈에 젖어있던 히로코사장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지난
64년.
남편이 돌연 탈샐러리맨을 선언하고 나섰고 이후 10여년동안 남편의 전직이
14번이나 계속됐다.
히로코사장의 잠자고 있던 장사꾼기질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독특한
판매시스템을 동원하고 있는 한 세제업체를 발견, 남편에게 취직을 권유
하면서부터이다.
홈파티형식의 시험사용설명회를 열면서 판매하는 이 회사는 대리점형태로
운영됐다.
총액 1만엔이상의 상품을 사면 "메이트"라는 회원자격이 주어져 15% 인하된
가격에 물건구입이 가능하기때문에 메이트는 이회사의 상품을 가져다
특약점이나 대리점형식을 빌려 비즈니스를 할 수 있었다.
샤르레의 창업은 이 세제회사의 대리점을 운영하던 남편이 친구의 부탁을
받아 란제리를 끼워 판 것이 본부에 알려져 해고당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앞서의 판매시스템을 활용, 샤르레는 급속도로 점유율을 넓혀갈수 있었다.
물론 순조롭기만 한것은 아니었다.
창업 3년째인 지난 77년 전체매출의 30%를 차지하던 고베의 대리점이 다른
회사의 상품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다른 대리점으로부터 클레임이 들어왔고 회사의 신뢰성이
곤두박질쳤다.
눈물을 머금고 반기를 든 대리점을 잘라내버린 하야시내외는 나란히 삭발을
한다.
이것이 종업원의 사기를 높이는데 한몫했고 자연히 매출도 한해전의 두배로
끌어올릴수 있었다.
샤르레가 결정적으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게 된 계기는 지난 79년
찾아왔다.
란제리디자이너이면서 직접 생산공장도 운영하던 호리에쇼지를 소개받게된
것.
그는 첫대면에 다짜고짜 "브래지어 착용하고 있나요"라고 물었다.
히로코사장이 멋쩍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에는 제대로 된 브래지어가 없어요. 지금 파는 것은 모유띠 정도에
불과합니다"
히로코사장은 공감했다.
실제로 일본 란제리업계는 디자인위주 일색으로 출산후 체형이 변한
주부들을 겨냥한 제품은 없었다.
히로코사장은 샤르레의 표적대상을 30~40대주부로 잡고 호리에쇼지에게
"제대로된 브래지어제작"을 의뢰했다.
소재개발에 1년반, 디자인에 반년을 투자, 완성된 상품은 판매 2년만인
83년 연간 50만개씩이나 팔려나갔다.
이듬해부터는 매년 100만개이상의 판매를 지속,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최고히트상품이 됐다.
"창업초기 독점시장 진출은 자살행위라며 뜯어말리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뚫고 들어갈 틈새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창업 21주년이 되는 내년부터는 피부마사지및 신발수리등의 신규사업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히로코사장의 열정은 식을줄을 모른다.
< 김지희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