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겋게 달군 놋쇠덩이를 모루(머릿쇠)에 놓고 망치로 두들긴다.

얇아진 판막을 다시 둥글게 각지게 요모조모 두들긴다.

이어 놋그릇 놋쟁반 놋화로 놋대야 놋향로 징 꽹과리...등 각종모양의
유기가 만들어진다.

일 새벽6시 경기시화공단의 5바8백10블록에 위치한 납청유기공장.

영하의 기온에도 불구하고 우김질(놋쇠를 늘리는 작업)에 여념이 없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인 이봉주사장(69)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유기전문업체인 납청유기는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방자유기기술로
수백년의 고풍을 간직한 제기 꽹과리 징 식기류등 각종 놋쇠제품을
생산하고있는 업체이다.

이 회사가 예부터 전해내려온 전통적인 방법을 계승 발전시켜 현대인에게
맞는 다양한 제품을 개발 생산, "우리 조상문화"의 확대보급에 나서 주목을
끌고있다.

한국인의 일상적 기물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으면서도
스테인리스 플라스틱류에 밀려 잊혀져가고있는 유기의 부흥에 앞장서고
있는것.

방자유기는 78%의 구리와 22%의 주석으로 이루어진 용해된 금속괴를
불에 달구어 망치질 또는 단조법으로 만든 놋쇠제품을 말한다.

"옛날 부엌세간중에서 수저와 주발대접같은 기본 식기들이 놋쇠이고
제기도 마찬가지이지요.

또 놋쇠로 된 대야와 요강등은 신부의 주요혼수품목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우리조상들이 수천년동안 생활식기로 사용해온 유기를 오늘에
되살리는데 온힘을 쏟을 계획입니다"

이사장은 방짜유기의 고장인 평북 정주군출신으로 50여년간 오로지
유기제작에만 매달려온 사람이다.

평북정주의 유기공장에서 일하다 해방후 월남, 57년 서울구로동에
방짜유기공장을 설립한 이후 경기안양을 거쳐 현재의 시화공단내
공장으로 이전하는 동안 23명의 직원을 거느린 업체로 성장했다.

"평북정주에서 일할 당시만 해도 혼사가 이뤄질때 상대방댁의 부엌을
살짝 염탐합니다.

부엌에 놋그릇들이 얼마나 구색맞춰있느냐, 얼마나 깨끗이 손질돼
있느냐에 따라 그 혼사가 이뤄지거나 않거나했지요.

그만큼 장사도 잘됐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연탄이 나오던 50년대로 회상하는 이사장은
"전세계에서 우리나라 선대들의 유기문화가 가장 앞서있었고 각가정에
일반화되어 있었는데도 현재 너무나 빠르게 잊혀져가고있는것이 안타깝다"
고 말한다.

현재 1백여종류의 놋쇠제품을 생산해온 이사장이 최근 개발한것만도
탁상종 촛대를 비롯 갓과 담뱃대를 실크인쇄한 꽹과리등 10가지에 이른다.

지난93년엔 세계에서 제일 큰 징(지름1m60.98kg)을 제작하기도했다.

10여년전 작업중 쇳조각이 오른쪽눈에 들어가 현재 의안을 사용하고
있는 이사장은 요즘도 새벽에 기상, 거의 매일 4시간반씩 기술의 난이도가
높은 우김질에 몰두하고있다.

"방짜유기박물관을 설립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물론 유기를 좀더 연구개발, ''우리고유의 기술''을 활용해 국내시장은
물론 국제적상품으로 발돋움할수있도록 노력해야지요"

이사장은 가격경쟁력을 갖추기위해 방짜유기를 중국현지에서 제작해
일본 유럽등지로 수출할수있도록 중국천진의 회사와 합작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납청유기는 서울종로의 만물상과 서울인사동의"납청놋전", 국악관련
단체 등에 각종 놋쇠제품을 납품해왔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경쟁력있는 세계적 상품개발이 시급한
상황에서 이사장의 일에 대한 열정과 장인정신이 더욱 빛나보인다.

<신재섭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