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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 1,000억달러 시대] (기고) 신국환 <한전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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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만이 살길"을 외치면서 경제개발에 나선 지 30여년만에 1,000억달러
    수출시대를 맞았다.

    수출역군이라는 말이 나라의 모토이다시피 하던 시절의 담당 공무원으로서
    실로 금석지감을 금할수 없다.

    60년대초 경제개발의 방법론을 놓고 숱한 논의 끝에 "수출입국"의 길을
    선택한 것은 당시로서는 일대 모험이었다.

    당시 수출에 의한 경제개발에 대한 거센 반대론의 근거는 우리같은 후진국
    이 수출을 해서 경제개발에 성공한 예가 전무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64년 수출총액이 처음으로 1억달러를 넘어서게 되자 비로소
    수출입국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대통령을 최고사령관으로 하는 전정부적 범국민적 수출추진
    체제가 출범했다.

    연간 수출목표는 월별로 다시 세분되고 품목별 국가별 수출진도를 대통령이
    직접 챙기는 상황이니 목표달성은 지상명령과 다름없었다.

    이러한 국민총화의 노력은 71년 10억달러를 돌파로 첫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그 직후 수출전선은 국내외의 숱한 시련에 당면하였다.

    미국이 우리의 수출 주종상품인 섬유 신발에 대해 수입규제를 강화한
    것이다.

    73년에는 석유위기의 한파가 밀어닥쳤다.

    위기는 분명 위기였다.

    그러나 수출팀과 업계는 오히려 수출정책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갔다.

    중화학공업육성 기술개발 품질향상 해외시장 개척활동의 강도를 높여
    수출을 늘리는데 주력하였다.

    수출증대의 일관된 의지와 국민적 결집은 77년 또 하나의 탑을 쌓았다.

    100억달러 수출고지를 넘어선 것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수출입국을 거듭 확신하게 됐고 "우리도 할수 있다"는
    캔 두 정신(Can Do)이 계발되었다.

    그렇지만 100억달러 수출개척 과정은 험난함 그 자체였다.

    70년대는 세계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과 높은 실업률로 몸살을 앓던 터여서
    각국의 수입규제가 잦았고 수출경쟁도 치열하였다.

    정부와 수출업계에 이런 어려움은 더욱 합심 분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출을 주도하던 공무원과 유관기관 임직원들 사이에서 "수출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가사바꾼 노래와 "수출은 가도가도 산"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것이 이때이다.

    100억달러 달성 직후 "80년대 후반 500억달러 수출 달성"목표가 정해지고
    수출산업 지원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그런 가운데 79년 수출 총사령관격이던 박대통령이 서거하고 수출입국의
    결의는 크게 흐트러졌다.

    수출부진과 수입증대로 인해 80년대 초에는 외채위기를 맞았다.

    수출팀과 업계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수출진흥의 목소리를 다시 드높였다.

    정책기조를 수출증대 쪽으로 돌려놓고 흐트러진 500억달러 수출체제를
    다시 가다듬었다.

    수출경쟁력 강화노력과 함께 85년말부터 밀어닥친 3저 호기를 타고 초유의
    무역흑자를 달성하였다.

    내친 걸음으로 88년에는 500억달러 수출을 이룩했다.

    90년대초 한때 수출부진의 늪에 빠지기도 했지만 국제경쟁력 강화를 꾸준히
    추진한 결과 이제 수출 1,000억달러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수출 1억,10억,100억달러는 마력의 숫자인 동시에 나라발전의
    분수령이기도 했다.

    수출 1,000억달러는 우리나라가 선진산업국으로 진입하는 분수령임이
    분명하다.

    새출발의 결의와 함께 새로운 청사진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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