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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자칼럼] 경동약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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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 한약재를 교환하거나 매매하는 시장을 약령시라고 부르는데는
    두가지 설이 있다.

    관의 명령에 따라서 열린 시장이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관이 월별로
    약재를 채취하는 기준을 마련해놓은 월령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앞의 설을 따르고 있다.

    옛날 한반도에서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약재인 당약(당재)을 많이
    썼으나 조선조 초기에 들어와 향약의 채취와 재배를 장려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약재는 지방관아를 거쳐 중앙관서에 진상되어 관의
    수요에 충당되고 그 잉여품은 민간에서 이용되었다.

    그뒤 중종이후 임진왜란때까지의 시기에는 다시 당약의 사용이
    많아져서 약전이 황폐화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향약의 관청공납이 계속되는데다 공물수납담당관리들의
    부정과 수탈이 생산농민들을 괴롭혔다.

    거기에 임진왜란뒤 중국의 약재부족사태까지 겹쳐지게 되었다.

    조정은 또다시 향약의 생산을 장려하는 한편 관폐를 바로 잡는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대동법에 따라 공물을 약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미곡으로 환산
    하여 수납한 다음 그 미곡으로 소요약재를 사들이는 것이었다.

    그것이 약령시를 태어나게 한 배경이다.

    약령시가 생겨난 것은 효조때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예로부터 약재의 중요산지인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의 주읍인 대구 원주
    전주에 관찰사의 관할하에 약령시를 개설했다.

    처음엔 월령에 따라 매년 몇차례 열렸으나 뒤에는 음력2월과 10월에
    두번 열리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시장이 열리면 먼저 구매리가 청나라에 보낼 조공약재와 조정에 필요한
    약재를 매입한 다음 일반인들의 거래가 이루어 졌다.

    당시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대구약령시였다.

    1658년(효종9)에 문을 연 이 약령시는 그동안 성쇠를 거듭하면서도
    오늘날의 남성로 "약전골목"으로 명성을 면면히 유지해 왔다.

    일제강점기에는 중국 일본 인도 중동 아프리카 유럽의 약재들이 모여들어
    국제적 약재시장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로 했다.

    그밖에 원주와 전주를 비롯 공주 진주 청주 충주 대전 개성 제천에도
    약령시가 개설되었으나 그다지 번창하지 못했다.

    뒤늦게 출범한 서울 경동시장의 한약상가가 전국유통한약재의 70%를
    취급하는 곳으로 발돋움하여 지난 6월에 서울시로부터 약령시로 지정받은데
    이어 이번에는 그 선포식을 가졌다.

    한방의 우수성을 내외에 널리 알릴수 있는 명실상부한 한약재의 메커가
    되길 빌어마지 않는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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