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만에 보는 시드니는 백호주의 색깔을 벗은 세련미로 뛰어난 풍광에다
활기를 얹고 있다.

그 동쪽 3시간여 비행거리 뉴질랜드 역시 전토가 목장이다시피 한 무공해의
부러운 자연은 난형난제.

다만 남한 3배면적에 인구 3백50만명이란 저밀도가 오히려 발전의 한계.

아직은 찻잔속 바람인 마오리의 민권운동 기운이 그 위에 그늘을 겹쳐
드리운다.

부쩍 는 해외여행객이 왜 하필 그런 복지가 서양인의 차지가 되었는가,
나름대로 이유를 캐는데 시간을 쪼갠다면 최소한의 외화값은 하는 셈
아닐까.

신천지 개척하면 2차대전 말까지만 해도 24시간 해가 지지않던 영국을
당할 나라가 없다.

그런 영국이 20세기후반 단 50년에 그 많던 식민지를 다 내주고 8등국으로
까지 국력이 기울었다는 사실은 분명 20세기 기적중 하나다.

그런 뜻에서 영국은 좋은 양면교사다.

영국이 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퇴한데는 물론 복합적 원.근인이 있다.

최근 영국서 이를 다시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신간의 요점이 외지 서평에
실려 주목을 끈다.

"The Lost Victory"와 "The Five Giants;A Biography of the Welfare
State" 두권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전후 미국의 마셜 원조를 적절히 사용치 못한데서 원인을 찾는다.

서독은 파괴된 산업시설의 현대화에 집중 사용, 패전을 딛고 대국이 되었고
영국은 산업시설 사회자본도 아닌 식량증배와 대미 부채상환 준비에 신경과
돈을 썼기에 확대재생산이 제약됐다는 견해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안할 말로 승.패전이 뒤바뀌었다면 과연 영.독의
선택도 달라졌을까.

여하간 노동당정권 뿐만아니라 처칠도 역설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지향, 그 결과 얻은 영국병을 새삼 들춘것 같다.

다른 시각에서 양국의 상반된 진로는 당시의 지도자, 실제로 그들의 참모
역을 맡은 관료집단의 역사관 사고력 미래관에 좌우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당시 영국 관리들의 애국심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문제는 그 내용과 균형이다.

W G 섬너는 외부 집단에 대해서 공포와 적대감을 갖고 자기가 속하는 내부
집단은 이상화 절대화하는 근대이전의 애국심을 에스노센트리즘(자민족
중심주의)이라 했다.

봉건 몰락후 시민계층이 형성되고 국민의식이 싹트면서 질적으로 다른
근대적 개념의 애국심이 자리잡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애국심은 절대주의 권력에 조작당하거나 자본주의내의 알력속에
잘못 이용되면 침략주의 암영을 드리운다.

명치이후의 군국주의 일본이 그 직례다.

여기에 비해 이땅의 애국심은 특수하다.

임란의병, 한말.기미운동, 상해임정등 항일 구국으로 이어지는 한국인
애국심의 정통은 콧등 찡한 뭉클한 감정이되, 공존적이기 보다는 배타적
요소가 강하다.

자기만 진짜 애국이고 동료가 갖는 애국심은 순수하지 않고 의심스러워
보인다.

애국심은 이성과 감정에서 후자쪽에 가깝기 때문에 넘치면 모자람만도
못할수 있다.

병적이라 할만큼 끔찍한 모성애가 자식의 장래를 망칠수 있듯이 애국심
또한 방향을 잃고 도를 지나칠때 나라에 유해할 위험성이 도사린다.

유사이래 관의 신분이란 근래 영.독에서 보듯 국운을 좌우하는 막중한
직분임을 부정할 사람은 어디도 없다.

민주주의를 국민에 의한 정치라 칭송하지만 국민대표의 참여를 제도상
보완한것 뿐이지 고금 행정관의 권한에 실질적 변동이란 없다.

그렇기에 과거도, 현재도, 근미래에도 정권쟁탈과 감투싸움은 중단없이
존속할 것이다.

유사만족할 대체직업이 많이 생겨가고는 있지만 그것이 관의 절대값 하락을
동반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형평이 생명인 민주사회에서, 싱가포르라는 예외가 시험중이긴 해도
누구나 열망하는 관감투를 쓴 사람에겐 급여의 상쇄라는 균형장치가 보편화
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라도 절대로 양보하지 못할 관의 본질이 있다.

그것은 자기존경, 곧 자존심이다.

낮은 보수, 청렴의무에 불구하고 관지향 열기의 영구함은 자존심 덕이다.

그런 자존심의 이면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애국심의 독점 내지 전유다.

아마도 관료사회에서 하루 거르지 않고 열리는 대소고하의 회의에서 누구도
빼놓고 넘어가선 안될 단어가 있다면 그건 국리민복이다.

바로 애국심이 존재하는 이유다.

다시 말해 애국심이란 피치자 국민은 절대 가져서 안되는 지배자(구군주,
통칭 현 통치권자)및 그 대관들만의 전유물을 이름함이다.

애국심의 한계를 관료사회에선 간단하게 긋는다.

일반인, 특히 이윤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인과 그 종업원들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나라의 이익보다 회사이익, 즉 공아닌 사익을 우선한다고
본다.

오로지 관만이 나라를 사랑한다고 확신한다.

3단논법으로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정부란 미명의 관의 규제란 있으면
있을수록 국리민복을 증진시킨다.

바꿔 말하면 국제화 세계화가 되면 될수록 안전판을 관이 계속 쥐어야지,
해외투자등 경영권과 국민의 진취적 자활권을 민의 손에 넘겨줘선 위험천만
하다는 사고가 관가에 끈덕지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가 뿌리를 내리면서 이 땅에도 국산품애용 차원의 애국심이 수용될
공간은 좁아져간다.

스스로의 정당성 강화를 노린 정권 탈취자들의 애국심 강매가 일정한 몫은
했겠지만, 애국심도 이제 성숙해 가야 당연하다.

실은 애국심은 선민만이 독점해야 할 만큼 특별한 것이 아니다.

약속을 지키고 거짓말 안하는 성실성,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려 애쓰고
부당히 입힌 해를 회복시키는 보상, 노력성과에 따른 분배정의, 타인에 대한
선행과 자신의 개선노력이 애국심을 대체해야 시민사회가 산다.

마치 붉은 횡선친 신분증을 발급해 그 소지자에게 특권을 부여하던 건국-
동란기의 사고로 특별한 계층이나 직책만이 배타적으로 애국심을 독점하는
오만을 발붙이게 하는 한 끊임없이 당하는 망신살을 이 사회가 면하려면
요원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