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와 복종, 그리고 질서가 통치이념의 근간이었던 조선왕조에서는 어디
까지나 백성의 도리였다.

그런 탓으로 비록 정의를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고소나 고발이 결코 미덕
일수는 없었다.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보면 고소나 고발을 할수 있는 개인
의 권리는 엄격하게 규제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한 집안의 자손이나 처첩으로서 부모나 가장의 비행을 고발하는 자는 모반
이나 반역을 제외하고는 교수형에 처하도록 규정해 놓았고 노비로서 가장의
비행을 신고하는 자는 곤장 100대를 친뒤 죽을때까지 변방에 유배하는
"장일백류삼천리"라는 중형으로 다스리도록 했다.

또 해당 고을에서는 백성으로서 그지방 관찰사나 수령을 고소하는 자는
고소를 접수하지 않고 곤장100대를 때려 "장일백 종삼년"이라는 극형에
처하도록 규정해 놓았다.

물론 자기의 원통한 일을 고소하는 자는 모두 들어주어 심리하되 무고한
자는 "장일백 류삼천리"에 처하도록 했다.

특히 이명서는 비록 국사에 관계되는 것이더라도 발견한 사람이 즉시
불태우도록 했고 만약 말을 옮기는 자나 불태우지 않은자가 있으면 모두
율에 따라 엄벌하도록 했다.

사회의 질서를 잡아 가족간 관민간의 조화와 인화를 강조하고 있는 이
법률을 보면 개인보다는 사회를, 정의보다는 조화를 앞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서양과는 판이하다.

법무부 집계에 따르면 93년 접수된 고소사건은 36만7,00여건, 고발사건은
35만5,00건으로 갈수록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수사결과 대부분 무혐의 처분되고 개중에는 오히려 무고죄로 구속된 고소.
고발인이 1,100여명이나 된다니 남을 음해하는 무서운 세태를 보는 것 같아
섬뜩해진다.

특히 일본에 비해 고소는 36배, 고발은 157배라는 분석도 왠지 꺼림칙하다.

유교의 영향을 깊게 받은 한국인은 "윤리적"이어서 오로지 자기가 믿는
정의만을 추구하는 탓으로 합의를 중시하지 않는 독자적 경향이 강하다고
했던 어떤 철학자의 주장이 생각난다.

그런 개인적경향이 서구의 개인중심적사고와 맞닿아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을 무고하는 자는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정의를 위해서는 법의 판결만이 최상의 해결방법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조화를 완전히 무시한 정의의 추구는 자칫 잘못하면 그 본래의 목적을
상실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