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열 <현대경제사회연 책임연구원>

"소비"를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절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소비를 생계의 유지,더 나가서는 생활의 윤택함을
추구하는 지출행위로 보기 보다 물가의 상승 요인,또는 투자 재원의
감소라는 측면에서 보는 우리의 정서에 기인한다.

이처럼 가계 경제의 미덕을 소비의 축소와 저축의 증대로 보는 것은
많은 투자 재원이 필요하고 내수보다는 수출위주의 성장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 경제의 현실을 생각할 때 당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의 고도 성장과 함께 확대된 소비자의 구매력과 소비문화의
발달,그리고 개인주의의 팽배 속에서 절약의 미덕은 점차 그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절약의 개념도 시대의 조류에 따라 수정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 쓰지 않는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현명하게 쓰는 것이 절약이라는
개념이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현명한 소비를 정의하자면 "자신의 생활에 진정으로 효용가치가 있는
제품을 선택하여 그 가치 만큼 값을 지불하고자 하는 소비 행태"라 할수
있다.

이러한 소비 행태는 물론 소비자 자신의 가계 생활을 안정되고 풍요롭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더하여 소비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기능,즉 기업의
경영활동에 대한 평가라는 측면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합리적 소비
행태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중요성을 더욱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생산자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제품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소비자의 구매행위는 기업의 측면에서 보면 경영활동에 대한
평가가 된다.

만약,소비자가 무계획적인 충동 구매를 일삼는다면 그 만큼 경영에 대한
평가기능을 상실하게 되며,기업도 진지한 자세로 제품 하나 하나에 최선을
다할 요인이 감소하게 될 것이다.

특히 외국산 제품이라면 비정상적인 가격의 지불도 마다하지 않는
소비행태는 외국 기업으로 하여금 한국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철저하게 노력할 동기를 우리 스스로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미국과 같이 환불( refund )제도가 발달된 나라의 경우,소비자는 이미
구입한 제품이라도 자신의 욕구에 부합되지 않으면 구매 대금을 그대로
돌려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기업들은 이러한 시장 환경에서 어떻게든 소비자의 선택을
받고 판매 후에도 고객을 실망시키지 않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생산자로 하여금 이렇게 소비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게 하는 데는 자신의
소득을 지출할 때 그 가격에 합당한 효용가치를 철저하게 요구하는
합리적인 소비자 정신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요즈음 이미 상식이 되어 버린 소비자 중심의 경영도 그 진정한 성공
여부는 사실 소비자의 의식 수준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제 국내시장은 "세계화"의 대명제 아래서 완전히 개방되고 있다.

우리 소비자 개개인의 성향이 모여 세계 속에서 한국 시장의 성격을
결정 지을 것이고,국내 기업을 비롯한 세계 도처의 유수한 기업들이
이러한 성격에 적합한 제품과 마케팅 전략을 가지고 다가올 것이다.

이들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는 우리의 소비 행태에 달렸다.

소비는 1차적으로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수단이지만 동시에 생산자의
노력에 대한 평가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아직 우리 경제의 현실은 소비보다는 절약이 미덕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절약의 기본 정신에 합리적인 소비라는 현대적인 옷을 입힐 때,
우리는 더욱 현실에 부합되는 가계 경제의 철학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정직하고 진취적인 기업의 활동을 보장하는 기초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