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지러운 때는 한쪽에서는 난세를 혐오하는 사상이, 다른 한쪽
에서는 난세를 구하려는 사상이 나오게 마련이다.

주나라 말기으 난세에는 공자의 유가와 노자의 도가가 중국사상계를
대표하는 두가지 경향이었다.

공자가 현실긍정적 구세사상에 몰입했던 사상가였다면 반대로 노자는
현실부정적 출세간사상에 기울었던 사상가였다.

노자의 행적을 기록한 사료는 거의 없다.

단지 그의 성이 이씨이고 이름은 이, 자는 백양, 시호는 담이며 초나라의
고현 향곡 인리사람이라는 것과 주나라의 문서보관소인 수장실의 관리자
였다는 단편적인 것만이 전한다.

도저히 도가 시행될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노자는 국경검문소인
함곡관을 나가서 유유히 서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때 함곡관의 장(영윤)이었던 희의 간청을 받고 지였다는 것이 그의
유일한 저서인 5,000천자 남짓한 "도덕경"이다.

이밖에 공자가 23세때 곡부에서 20일을 걸어서 낙양의 문서보관소로
노자를 찾아가 예에 대해서 물었다는 기록이 전해져 노자가 기원전 551년에
출생한 공자보다는 선배였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노자사상의 특색은 형이상학적인 도의 존재를 설파한데 있다.

노자는 흔히말하는 도가 일면적 상대적인 것에 불과함을 논파하고 항구
불변의 적대적인 새로운 도를 제창한다.

그가 말하는 도는 천지보다 앞서고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적 존재이며
천지간의 모든 현상에서 이를 성립시키는 리법이다.

대자연을 지탱하게 하는 것이 도이며 그 도의 작용을 덕이라고 했다.

인간도 얇팍한 지혜를 이용해 기교를 부리고 있는 가짜 세상, 즉 유한한
현상계를 벗어나 무한한 도와 합일하게 되면 영구불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옛날의 무위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것도 그때문이다.

중국 안휘성 고고문물연구소가 안휘성 와양현 정점에서 노자의 출생지인
천정궁유적을 발굴했다고 한다.

이곳이 노자의 출생지임을 새긴 비석을 비롯 노자의 석상등 1,000여점의
유물과 노자생모의 무덤, 제자 윤희의 무덤도 발견됐다는 소식이다.

노자의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학자도 있었던 터라 2,500여년전대 사상가
의 유적발견은 세계의 관심사가 되기에 충분하다.

염치없이 명리를 추구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요즘
세상에서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그 알량한 지혜나 의욕을 내동댕이
쳐버리고 천진난만한 어린이처럼 무위자연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질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 가치관의 근본을 파 내려가다 보면 아직 노자의 사상에서는 배울점이
많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