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멈,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어요?"

희봉은 조노파가 남편의 유모라 남편을 따라 어머님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녀의 신분이므로 그냥 할멈이라고 부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남편 가련도 어릴적부터의 버릇대로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그 호칭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아, 오다가 들었죠.가정 대감 댁에서는 환호성을 지르고 야단이
났다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가정 대감 집 하인 하나가 달려와서 가정 대감이 가련을
부른다고 전갈하였다.

가련이 옷을 갈아입고 부리나케 일어나서 바깥으로 나갔다.

희봉은 모처럼 남편과 단 둘이 앉은 주안상 자리가 집안 일로 파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황제 폐하의 후비가 된 원춘이 친정 나들이를 한다니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다.

오늘 저녁 가정 대감 집에 집안 어른들이 다 모여 후비의 성친 문제로
한창 의논들을 하게 될 것이었다.

무엇보다 후비가 친정으로 와서 거할 처소준비가 급선무일 것이었다.

희봉은 조노파와 더불어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나누며 가련이 빨리 돌아와
자초지종을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주기를 기다렸다.

"황제 폐하께서 효심이 지극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태상황마마와
황태후마마를 주야로 몸소 가까이 모시고 계시면서도 늘 효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자책하신다는군요"

조노파가 시중에 나도는 황제 폐하의 효심에 관한 이야기들을 희봉에게
주섬주섬 들려주었다.

"할멈, 그러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궁중에 들어온지 오래 되는 궁녀들이나
비빈들이 얼마나 부모와 그 집을 그리워할까 그 심정을 헤아려주신 거군요"

"바로 그렇죠. 효를 모르는 황제 폐하시라면 어찌 그런 은총을 베풀
생각이나 하셨겠어요?"

두 사람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희봉의 눈앞에도 부모님의 얼굴들이 어른거렸다.

오빠 왕인을 비롯하여 식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녕국부와 영국부 일들에 매여 친정집에 한번 다녀올 틈조차 없는 희봉이
아닌가.

"저는 말이죠, 효를 받아보기는 커녕 아직도 아들놈들 걱정에 한시름 놓을
때가 없답니다"

조노파가 혜천주를 들이켜고 나서 잔을 놓으며 한숨을 푸우 쉬었다.

조노파가 말한 아들놈들 중에 가련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닌게
분명한데, 어떤 아들들을 두고 하는 말인가.

희봉이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알았다는 눈빛으로 조노파를
찬찬히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 뱃속에서 난 두 아들놈들 있지 않습니까. 그놈들이 이태껏
허드렛일들만 하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좀 좋은 자리를 맡았으면 하고."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