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종이 지능을 데리고 하인들이 주로 드나드는 영국부 쪽문을 빠져나와
근처 뒷산으로 들어갔다.

인적이 드문 계곡의 바위 그늘에 앉아 진종이 지능에게 따져물었다.

"아니, 이렇게 난데없이 수월암을 도망쳐 나와 여기 성내로 들어오면
어떡해?"

"어차피 수월암에서도 쫓겨날 판인데 뭐"

지능이 주눅이 든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아무래도 임신을 한것 같애"

그러면서 지능이 한숨을 푹 쉬었다.

진종은 머리속에서 번개가 치는 느낌이었다.

아이구.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그렇다고 나를 찾아오면 어떡해?"

"그럼 누굴 찾아가?"

하긴 진종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진종이 지능과 수월암에서 처음 관계한 날에 보옥도 함께 관계한 것을
진종이 알았다면 발뺌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물론 진종이 지능을 떼어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어떻게 그 씨가
내씨인줄 아느냐고 윽박지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진종은 지능과 관계를 맺을 때 지능이 이미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육감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큰일 났는데"

마음이 그렇게 악하지 않은 진종이 지능이 자기의 씨를 배고 있음을
인정하고 결국 함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룻밤 불장난의 대가치고는 벅찬 편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애기를 배어서"

지능이 모기만한 소리로 말하며 가만히 흐느꼈다.

진종이 지능이 불쌍하게 여겨져 마음이 아팠다.

지능이 천애고아로서 의지가지 없이 절간으로 들어와 여승이 되어
그럭저럭 살만하게 되었는데,진종이 자기가 끼여들어 지능의 인생을
망치게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능을 아내나 첩으로 맞아들여 그 인생을 책임져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아버지 진업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변명 한마디 꺼내기도 전에 작살이 나고 말
것이었다.

"애기를 지우는 방법이 없을까"

진종은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어떻게 애기를 지우는지 그 방법을 들은
적도 읽은 적도 없었다.

"내가 죽으면 애기가 저절로 지워지죠"

지능이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자 진종의 마음이 더욱 우울해졌다.

"좋아. 당분간 어디 숨어 있어. 내가 거처를 마련해볼 테니까.
그리고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궁리해보자구"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