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멸치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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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어류40종이 기록되어 있고 그보다 80년 뒤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60종의 어류가 실려있다.
그러나 중요한 어류로 취급되지 않았기때문인지 "멸치"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멸치가 잡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은 조선조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
한다.
1803년에 김려가 지은 "우해이어보"에는 "멸치는 "멸아"라고 하고 더운날에
안개가 짙게 낄때 조수가 솟는 곳에 가서 삼태그물로 건져 올린다"는 대목이
나온다.
1814년에 지은 "자산어보"에는 멸치는 "추어"라는 것인데 그 속명이
"멸어"라고 고증했다.
또 멸치는 불빛을 좋아하기 때문에 밤에 등을 밝혀 유인한뒤 그물로
떠올린다고 적어 놓았다.
조선조말기에 오면 멸치를 대량으로 잡은 것이 확인된다.
현종때 사람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멸치는 한번 그물을 쳐서
만선이 되는데 즉시 말리지 못하면 썩어서 거름으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많이 잡아 건멸치는 날마다 먹는 반찬으로 삼고 회로
먹거나 구워먹는 것은 물론 기름을 짜기도 한다고 썼다.
서유 도 "난호어목지"에이규경과 비슷한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다.
일본에서 말린 멸치를 비료료 썼던 한말에는 멸치어업이 더 활기를 띠었다.
강원도 연안에서는 단 한번 그물을 치면 10,000여근의 건멸치를 생산할수
있었고 함남 려도근처에서는 너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잡혀 어망이 파손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1934년에는 48,000M/T이나 잡혀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어업을 생업으로하는 어촌이 형성된것은 고려때였고 당시에도 어장은 경지
와 비슷하게 취급됐지만 기본적인 소유형태는 어민들의 공유였다는 것이
학자들의 얘기다.
그러나 조선조 세종때에 오면 벌써 충청도 136, 황해도127, 함길도 2개소
등 각도별로 어장수가 집계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리 어민들의 공유였다
고는 해도 각도별 조업구역은 있었던것 같다.
당시에는 충청도나 전라도의 어장수가 경상도 보다 비교도 되지 않게
많았다는 것도 재미있다.
충남 보령앞바다에 까지 원정조업에 나섰던 경남 멸치잡이 어선 200여척이
저지를 받자 조업구역철폐를 주장하며 군산외항을 막고 이틀이나 해상시위를
벌이다가 해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충남 전북 어민들의 이에 대항하는 시위도 있었다고 한다.
가뜩이나 정계가 지역당으로 나뉘어져 불안한 판에 지역갈등이 해상이권
다툼으로까지 비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24일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60종의 어류가 실려있다.
그러나 중요한 어류로 취급되지 않았기때문인지 "멸치"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멸치가 잡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은 조선조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
한다.
1803년에 김려가 지은 "우해이어보"에는 "멸치는 "멸아"라고 하고 더운날에
안개가 짙게 낄때 조수가 솟는 곳에 가서 삼태그물로 건져 올린다"는 대목이
나온다.
1814년에 지은 "자산어보"에는 멸치는 "추어"라는 것인데 그 속명이
"멸어"라고 고증했다.
또 멸치는 불빛을 좋아하기 때문에 밤에 등을 밝혀 유인한뒤 그물로
떠올린다고 적어 놓았다.
조선조말기에 오면 멸치를 대량으로 잡은 것이 확인된다.
현종때 사람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멸치는 한번 그물을 쳐서
만선이 되는데 즉시 말리지 못하면 썩어서 거름으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많이 잡아 건멸치는 날마다 먹는 반찬으로 삼고 회로
먹거나 구워먹는 것은 물론 기름을 짜기도 한다고 썼다.
서유 도 "난호어목지"에이규경과 비슷한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다.
일본에서 말린 멸치를 비료료 썼던 한말에는 멸치어업이 더 활기를 띠었다.
강원도 연안에서는 단 한번 그물을 치면 10,000여근의 건멸치를 생산할수
있었고 함남 려도근처에서는 너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잡혀 어망이 파손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1934년에는 48,000M/T이나 잡혀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어업을 생업으로하는 어촌이 형성된것은 고려때였고 당시에도 어장은 경지
와 비슷하게 취급됐지만 기본적인 소유형태는 어민들의 공유였다는 것이
학자들의 얘기다.
그러나 조선조 세종때에 오면 벌써 충청도 136, 황해도127, 함길도 2개소
등 각도별로 어장수가 집계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리 어민들의 공유였다
고는 해도 각도별 조업구역은 있었던것 같다.
당시에는 충청도나 전라도의 어장수가 경상도 보다 비교도 되지 않게
많았다는 것도 재미있다.
충남 보령앞바다에 까지 원정조업에 나섰던 경남 멸치잡이 어선 200여척이
저지를 받자 조업구역철폐를 주장하며 군산외항을 막고 이틀이나 해상시위를
벌이다가 해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충남 전북 어민들의 이에 대항하는 시위도 있었다고 한다.
가뜩이나 정계가 지역당으로 나뉘어져 불안한 판에 지역갈등이 해상이권
다툼으로까지 비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