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모님께서는 제수씨가 고생을 할까싶어 그러시는 모양인데, 제가
잘 도와줄테니 염려마세요.

아니 제가 도와주지 않더라도 제수씨는 틀림없이 일들을 꼼꼼하게
잘 해나갈거예요.

제가 듣기에 제수씨는 어릴적부터 강단(강단)이 있고 또 시집을 와서
크고 작은 가사(가사)들을 능란하게 처리해 왔다고 하는데, 우리 집안
일을 하는데도 그간의 경험이 유용하게 쓰일 거예요"

"그래도 이렇게 큰 상사는 맡아본 적이 없는걸"

왕부인은 아직도 희봉을 보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숙모님, 우리 집안 일을 맡는 데는 아무리 생각해도 희봉 제수씨만한
사람이 없는것 같아요.

저나 제 안사람의 얼굴을 봐서가 아니라 죽은 며느리와의 정분을
생각해서라도 허락해주십시오"

가진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거듭 부탁을 하자 왕부인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진이 희봉을 건드리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은 어쩌면 노파심에서
우러난 기우인지도 몰랐다.

희봉이 그 집에 가면 부인 우씨와 늘 함께 지낼텐데 가진이 비록
흑심을 품는다 하더라도 아내가 있는 데서 함부로 다른 여자를 넘보지
않을 것이고 또 일전에 가서 상사병 사건에서 본 것처럼 희봉이
호락호락 넘어가지도 않을 것이었다.

이렇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돌려먹은 왕부인이 희봉의 생각은
어떤가 하고 그녀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희봉은 이미 가진의 집안 일을 맡아보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으므로 왕부인의 마음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그래 네가 아주버님 집안 일을 잘 해낼것 같으냐?"

왕부인이 희봉에게 넌지시 물었다.

희봉이 그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만면에 희색을 띠고 대답했다.

"못할 게 뭐 있겠어요? 바깥 일은 아주버님이 알아서 잘 처리하실테고
저는 집안 일만 맡으면 되잖아요.

그리고 제가 모르는 일이 있으면 마님께 물어가면서 하면 되고요"

희봉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왕부인으로서는 가진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진은 슬픔으로 초췌한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며 기뻐하였다.

이 일을 주선했던 보옥도 옆에서 벙긋이 웃고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가진이 허리를 굽혀 희봉에게 절을 하자 희봉은 송구스러워하며
맞절을 하였다.

가진과 희봉의 시선이 부딪쳤으나 그 시선에는 아직까지는 어떤
음심의 그림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