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해몬드(43) 인터보이스사 최고경영자(CEO)는 스스로를 "반항아"라고
부른다.

기존의 틀을 깨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찾지 않으면 불안하게 느낄 정도라고
털어놓는다.

해몬드 회장이 인터보이스사를 포브스선정 200대 중소기업 "고정멤버"로
키워낸 것도 바로 이같은 반항기질 덕분이다.

지난 80년대초 해몬드회장이 단돈 5만달러를 들고 PC용 쌍방향자동응답
(IVR)시스템 사업에 뛰어들었을때 주위에서는 온통 말리는 사람뿐이었다.

모두가 PC보다는 메인프레임이 훨씬 유망한 사업이라고 설득했다.

당시 PC시장은 워드프로세서보다도 못한 그야말로 "별볼일 없는"분야였다.

그러나 해몬드회장은 주위의 만류가 강해질 수록 더욱 PC의 성공에 대한
확신이 커졌다.

결국 해몬드회장은 온갖 만류를 뿌리치고 사업을 강행했으며 오늘날 IVR
시장점유율 9%, 매출 7,600만달러에 1,300만달러의 이익(94년기준)을 내는
튼튼한 중소기업으로 결실을 맺었다.

해몬드회장은 센트럴플로리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컴퓨터
터미널 디자인 회사에서 주당 30시간씩 일하면서도 3년만에 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73년 졸업한 후 그는 컴퓨터디자인 회사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반항기질"이 발동해 자기사업을 차리게 된다.

그는 "틀에 얽매이는 것은 견딜수가 없었다"며 "새기술을 개발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었다"고 회상한다.

82년 해몬드회장은 인터보이스의 공동 창업자 미셀 테사로윅츠를 만난다.

해몬드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던 테사로윅츠와 팀을 이뤄 수금용 자동
전화및 음성녹음 장치 제조회사 일을 거들게 된다.

이때 두 사람이 한 일이 녹음된 음성을 디지털화해서 디스크에 정보를
입력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두사람은 PC용 IVR시스템 기술을 개발하게 된다.

그이듬해인 83년 해몬드와 테사로윅츠는 독자개발한 IVR시스템 공급계약을
처음으로 수주한다.

계약주는 세븐일레븐.

과거 채무불이행 실적이 있는 고객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해 직원들이 고객의
운전면허번호만 두드리면 채무불이행여부를 알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소매점들은 한번 조회할때마다 10센트를 주고 외부 용역으로
이 작업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에비해 인터보이스의 시스템은 1회이용시 비용이 2센트에 불과했다.

"원가절감형"제품이라는 점을 무기로 인터보이스는 사업을 날로 확장해
갔다.

그러나 2년이 지나자 한계에 부딪쳤다.

회사를 더욱 키우기 위해서는 추가의 외부자금이 필요해 진 것이다.

해몬드회장은 인터보이스를 주식시장에 공개키로 결정했다.

주식 40%를 팔아 마련한 400만달러의 자금으로 새로운 IVR제품을 개발했다.

때마침 PC 붐이 시작됐다.

은행들은 원가절감을 위해 전화교환수 대신 앞다퉈 IVR시스템 도입에 달려
들었다.

지난 91년이후 인터보이스의 매출은 매년 43%의 고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올 매출은 9,400만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이제 성장 둔화의 기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느정도에 달하면 매출
신장이 둔화된다는 기존 기업사이클에 도전할 기회가 생긴 것이지요"

언제나 모험을 추구하는 이런 젊은 패기야말로 해몬드 회장의 원동력인
셈이다.

< 노혜령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