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봉이 전신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가운데 멍하니 넋을 잃고
있다가 한순간 몸을 벌떡 일으켜 부랴부랴 옷을 걸쳐 입고는 보옥의
어머니 왕부인 거처로 달려갔다.

그때는 이미 집안 사람들이 모두 진가경의 부음을 들었으므로 여기
저기서 슬피 우는 소리들이 나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니 희봉의 눈에서도 왈칵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보옥도 그 무렵 시녀들로부터 진가경의 부음을 듣고는 잠자리에서
급히 일어나다가 그만, "으윽" 비명을 지르며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도련님 왜 그러세요?" 습인을 비롯한 시녀들이 놀라서 달려와
보옥을 안아 일으켰다.

보옥의 입에는 시뻘건 피가 한줌 토해져 나와 있었다.

"아이구,이 일을 어쩌나. 도련님도 큰일 나셨네. 의원을 불러야겠네"

습인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소리를 높였다.

"소란 떨지 마.아무 일도 아냐.갑자기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서 간이
열을 받고 그 열이 심장을 침범해서 잠시 피가 잘못 흐른 것 뿐이야"

보옥이 습인이 건네주는 수건으로 입에 묻은 피를 닦고는 대부인에게로
달려갔다.

"할머님,지금 곧장 녕국부 큰집으로 건너가보아야겠습니다"

보옥을 따라온 습인은 속으로,도련님이 저러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부인 앞이라 감히 입을 열지는 못하였다.

"금방 숨을 거둔 사람에게는 가지 않는 법이다"

대부인이 슬픔을 참으며 차분히 보옥을 타일렀다.

"왜요? 진씨가 저에게 얼마나 잘 해주었는데요"

"이제 막 숨을 거두었으니 죽은 사람 누워 있는 방이 어수선할 것 아니냐.
그래서 그 주위가 정돈이 되고 난 후에 문상을 가는 것이 상례의
법도이니라. 그렇지 않으면 부정을 타기도 한단다. 그리고 지금은
한밤중이라 바람도 차니 내일 아침 가보도록 하여라"

"아니에요. 지금 가보겠어요. 진씨는 평소에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
왔으므로 깨끗한 가운데 숨을 거두었을 거예요. 할머니, 수레를
마련해주세요"

보옥이 고집을 부리자 대부인은 할수 없이 수레를 준비하게 하고
하인들을 불러 보옥을 잘 모시고 가도록 당부하였다.

보옥이 수레를 재촉하여 녕국부에 이르니 활짝 열린 대문 양옆으로
커다란 등불이 대낮같이 밝혀 있고,그 등불빛을 받으며 사람들이 바삐
드나들고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