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나마 같은 울타리안에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은 모임이란
걸 만들어 이런 과거의 추억을 되씹어보고 싶은가 보다.

"영맥회"의 시작도 그랬으니까.

우리모임에는 회칙이나 회비가 없다.

그리고 특별한 취미동호회의 성격도 갖고 있지 못하다.

서울과 대구를 번갈아가며 1년에 네차례정도 만나지만 굳이 이 횟수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그저 만나고 싶을때 의기투합해서 만나고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작은 일들,자식에 대한 애기들에 대해
종횡무진 입품을 파는 것이 고작이다.

이 자리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기심을 내세우거나 주의주장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그저 대학시절 언저리에 얽힌 추억을 애기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사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말끔이 씻어낼수 있는 기회가 되고,생활에 청량감을
주는 활력소로 작용한다.

일년에 두차례씩 가족동반으로 만나는 것 조차 너무 형식적이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을만큼 부담없는 만남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다.

개인주의 물결의 파고 속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같이하는 삶"의
참뜻을 일깨우고,우리의 모임을 대물림해 보자는 욕심에서 지난
80년초부턴 가족단위의 모임으로 발전시켰다.

애초에 8명의 모임으로 시작한 영맥회는 이제 줄잡아 32명에 이르는
제법 큰 모임이 됐다.

그러나 자주는 아니지만 앞장서는 이가 있으면 봄과 가을,산행을
즐기기도 하고,하기휴가때면 가족들과 함께 피서여행에 나서기도 한다.

지금은 회원모두가 지명을 넘긴 가장이 되었지만,우리들이 이 모임을
처음 가졌을 때만해도 청운의 꿈을 지난 20대 청년이었다.

각기 다른 전공을 가진 우리들은 단지 영남대라는 울타리 안에서
만났다는 것과,공교롭게도 모두 군보무를 마친 늦깎이 대학생들이란
동병상인의 정이 서로를 잇는 끈이었다.

막걸리 잔을 앞에두고 어두웠던 70년대말의 고뇌와 번민을 나누었고,
졸업할 무렵 누군가의 제안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모임을 만들었으니,
벌써 18년의 세월을 이어온 끈끈한 우정의 모임이 되었다.

서로 막연한 사이이다보니 간혼 어려움에 빠질 때는 스스럼없이
도움을 청할수도 있고,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도움을 주기도 한다.

특히 궂은 일이 있을때는 형제 이상의 정을 나누곤 한다.

그야말로 동고도 함께하는 동호동락인 셈이다.

모임을 처음 시작한 면면들은 김연부(민영전자 이사,현회장),김용상
(서울주택 전무),김점도(개인사업),정기원(삼성투자자문 차장),이연우
(대우증권 홍보실장),박병태(대구덕원고 교사),문상권(대구송현고 교사),
오세준(홍익고교사)등이다.

아무런 부담없이,그리고 아무런 형식없이 모이게된 영맥회가 먼
훗날까지 애뜻한 정을 나누는 모임으로 지속되길 기원해본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