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시대 관청의 실무를 맡은 사람이 아전이다.

중인계층에 속했다.

수령이 집무하는 정청앞에 아전이 일하는 유방청등이 있었다.

아전은 세습이 많았다.

그러니 그고장 물정에 도통했다.

중앙에서 내려온 수령은 까막눈인 경우가 많았다.

뭘 좀 알더라도 임기가 있으므로 마음은 노상 서울에 가있다.

자연히 아전들이 고을의 행정을 도맡다시피 되고 수령은 송사를 보는게
고작이다.(송사도 아전들이 차린 밥상인 수가 많았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게된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졌지만 이제까지 우리나라
행정의 기본구도는 "실무를 아전들에게 의존하는" 왕조세대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쉽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정약용의 "목민심서"같은 책에서도 수령들이 아전을 잘 다루어야 한다는
충고를 여러가지로 하고 있다.

아전의 손을 거친 뇌물을 먹는등 약점을 잡힌 원님을 아전들에게 영이
안서고 맥을 못추게 된다.

청렴결백하게 하려고 애쓰는 원님일랑 실무에 어두운 헛점을 노려 덫을
놓아 골탕을 먹인다.

거기 걸려들면 원님은 병신이 되고 아전들은 쾌재를 부른다.

신분의 불만을 해소하기도 한다.

왕조시대에도 모든 벼슬아치들이 썩었던 것은 아니다.

청백리 얘기를 끌어댈것도 없이 맑고 깨끗한 선비형 관리들도 많았다.

대원군이 반부패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그 시퍼런 서승에 조심하고 삼가하였다.

위는 꽤 맑아진 것이다.

헌데 아전들만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아아니 녹봉도 주지 않으면서 구전이나 정표마저 받지말라고?"

아전들의 불평이었다.

일정한 보수없이 그때그때 부가세적인 덤을 얹혀 뜯어먹고 살았던 것이다.

지금은 아전에 해당하는 관리들에게 녹봉을 주고 있다.

허지만 덤이 없는 일꺼리엔 그다지 정성을 들이지 않는 버릇이 약간은
남아 있는듯하다.

대원군은 아전개혁에는 실패했다.

녹봉줄 엄두가 나지 않았고 버릇을 도저히 고칠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혁은 본래가 일선행정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