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을 들고 온 사람은 가용과 함께 자란 가장이었다.

"아유, 가서가 어린애처럼 아랫도리를 다 벗고 있네. 물건이 그리
크지도 않으면서 화는 잔뜩 나있구먼"

가장이 촛불을 가서의 사타구니로 가져가 비추며 놀려대었다. 가서는
너무나 창피하여 허둥지둥 바지를 껴입으며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나려 하였다.

그러나 방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가장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도망가긴 어디로 도망가려고 그래. 우리 가문에서는 남색하는 자를
가만두지 않지"

가장의 말을 들으니 가서는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남색이라니? 난 남색한 적 없어"

"방금 가용이 당했는데 남색한 적이 없다구? 이런 놈은 가련 대감에게
끌고 가 혼을 내줘야 해"

가련 대감이라면 희봉의 바깥 어른이 아닌가. 가서는 다른 창피는
다 당해도 가련 대감에게 끌려가는 창피는 당하고 싶지 않았다.

"자네들 따져보면 나와 숙질간 아닌가. 사례는 톡톡히 할 테니까
제발 한번만 봐주게. 없던 일로 해달란 말일세"

"사례를 한다구? 그걸 말로만 해서야 누가 믿을수 있나? 문서로 증거를
남겨야지. 도대체 얼마의 돈으로 사례를 하겠다는 거야?"

가장이 촛대를 아예 구들 위에 내려놓고 흥정을 시작했다.

"이런 내용을 어떻게 문서로 작성할 수 있나?"

가서가 난색을 표명하자 가장이 그건 별 문제가 안된다는 듯이 대답했다.

"노름빚을 져서 돈을 꾼 것으로 하면 되지"

"지금 종이도 없고 붓도 없는데 어떻게 문서로 작성한단 말인가?"

가서는 될 수 있는 한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려고 잔꾀를 부렸다.

"잠깐만 기다리게. 종이와 붓을 가지고 올테니"

가장이 방을 나가더니 미리 준비라도 해가지고 온 듯 금방 종이와
붓을 들고 왔다. 가서는 치밀하게 계획된 어떤 음모에 말려든 느낌이었다.

가장과 돈의 액수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쉰냥 빚진 것으로
차용증을 써주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용이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슬그머니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일을 당한 것은 바로 나인데 나한테도 뭔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안 그러면 일가친척에게 이 사실을 다 폭로해야지"

그리하여 가서는 가용에게도 쉰냥 빚진 것으로 차용증을 써주지 않을수
없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