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는 희봉의 말만 믿고 종종 영국부로 가서 희전을 만나볼까
하였으나 그때마다 희전이 진씨 병문안을 하러 녕국부로 건너가고
없었다.

하루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하인이 들어와 희봉에게 아뢰었다.

"가서 나리께서 오셨습니다"

희봉과 함께 있던 팽아라는 시녀가 희봉을 흘끗 보며 비식 웃었다.

희봉이 녕국부로 가고 없을때 가서가 찾아와 팽아에게 희봉의 행방을
묻곤 했기 때문에 팽아 역시 가서의 속마음을 눈치채고 있는 터였다.

희봉이 팽아에게 눈짓을 하자 팽아는 화롯불 불씨를 다독거려 간수해
놓고는 방을 나갔다.

"그래? 얼른 안으로 모셔라. 바깥에는 눈도 많이 내리는데"

희봉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은 가서의 가슴은 두근반 세근반 마구
뛰었다.

하인의 인도로 방으로 들어온 가서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으며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여기로 와서 앉으세요. 추우실텐데"

가서에게 자리를 권한 희봉은 하인에게 차를 내오라고 시켰다.

방안에 희봉과 가서만 있게 되자 가서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련 형님은 어디 가셨어요?"

가련은 바로 희봉의 남편 이름이었다.

"글쎄요. 밤낮 늦으니. 어디서 여자에게 홀려 있나? 남정네들이란"

희봉이 짐짓 냉소를 띠며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정네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여자는 쳐다보지도 마음에도 두지 않는 사람
입니다"

가서의 말에 희봉은 쿡 하고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을 받았다.

"참말이지 가서 나리 같은 남자들만 있다면야 여자들이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나리같은 남자가 열명 중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하니
문제지요"

가서는 희봉의 칭찬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턱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귓불을 만져보았다 하다가 희봉에게로 좀 더 다가앉았다.

"그러니 아주머니는 날마다 심심하시겠네요?"

"말해 뭐해요. 늘 독수공방이죠. 말동무 할 수 있는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희봉은 더욱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서는 침을 꿀꺽 삼키고 숨을 한번 크게 쉬고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제가 미약하나마 말동무를 해드리면 안되겠습니까?

학당 일은 할아버지께서 잘 해나가시니 저는 별로 할 일도 없는데,
허락만 하신다면 날마다라도 와서 말동무를 해드리겠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