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간의 북경 쌀회담이 막판 진통을 견디고 21일 마침내 타결됐다.

남북협상이라고 하면 어떤 분야가 됐든 으레 서로 밀고 당기고 트집잡고
하느라 불지하세월이기 일쑤였으나 이번 쌀회담은 "먹고 사는 문제"라서
그런지 회담시작 5일만에 타결됐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놀랍다.

쌀은 가장 원초적 기초 생필품이면서도 가장 많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상품이다.

특히 우리민족에 있어서 쌀은 전통적으로 단순한 "물질"이라기 보다 "정신
이 들어 있는 물질"로까지 대우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쌀 한톨" "밥 한알"에 유별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도 이런 민족정서를
빼놓고는 이해될 수 없다.

심지어 불가에서는 쌀 한톨을 버리면 그것이 썩을 때까지 제석천(불법을
지키는 신)이 거기에 내려와 엉엉 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처럼 상징성이 풍부한 쌀을 우리가 15만t, 즉 100만섬이나 북한 동포들
에게 보내기로 했다는 것은 단순한 상품교류차원을 넘는 큰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북한이 한국 쌀을 받기로 한 결정을 두고 지나치게 그 의미를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번 쌀회담에서 보인 북한측의 유연한 태도가 곧바로 북한의 개방으로
이어지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이 한국쌀을 받기로 한 결정은 사실상의 한국형 경수로를
수용한 결정과 더불어 북한의 태도변화를 감지케 해준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 아닐수 없다.

우리는 이번 쌀회담의 성공 하나로 앞으로 남북한 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
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쌀의 선적과 함께 몇가지 기대도 함께 실어보내지 않을수 없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다.

우선 쌀지원이 남북경협과 남북대화의 촉매제역할을 해주었으면 한다.

정부차원의 남북 경협추진은 지난92년10월 남조선노동당 사건이 터지면서
중단됐고 남북대화는 작년7월 김일성 조문문제로 단절됐었다.

남북은 이번 쌀회담 성공으로 남북경협과 대화의 숨통을 틔울수 있는
호기를 맞은 셈이다.

그 다음 이번 한국쌀 수용을 계기로 북한에서도 실용주의의 가시화라는
노선변화가 있길 기대한다.

한국의 쌀제공이 북한정권내 실용주의노선 그룹의 입지강화에 도움을 주고
나아가 북한이 경제난과 국제고립을 탈피할수 있는 계기가 될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 정부로서는 경수로에 이어 이번에도 국민들에게 또한번 큰 부담을
안겨주게 되었다.

15만t의 쌀을 보내려면 도정및 수송비를 빼고도 어림잡아 2,000억원 이상의
재원이 필요하다.

협상성공에 자만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까지는 경수로다, 쌀이다 하여 일방적으로 주는 협상이었기 때문에
유리한 입지였지만 투자보장협정등 앞으로 벌여야 할 협상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정부의 협상능력은 정작 지금부터 시험대에 올려지는 셈이다.

정부나 기업이나 들뜨지 말고 차분하게 새로운 출발선에 서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