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은 21일 남측이 15만t의 쌀을 북측에 제공키로 최종합의했다.

5일간의 힘겨운 줄다리기 끝의 일이다.

이로써 올해안에 약2천억원에 이르는는 분단이후 최대규모의 물자교역이
남북간에 이뤄질 전망이다.

이와 함께 이번 쌀교역을 밑거름 삼아 민간분야에서의 교류가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사실 이번 대북쌀지원은 최악의 식량난을 겪고있는 동족을 돕는다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쌀 15만t을 가마로 환산하면 무려 1백87만5천개. 10t짜리 트럭이면
1만5천대의 차량이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이같은 대규모 물량이 주민들의 눈을 피해 몰래 전달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북한주민들의 남한을 보는 시각에 영향을 미칠수 밖에 없다.

더구나 품목이 "쌀"이라는 점에서 북한주민들의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게 분명하다.

북한은 또 남한으로부터 경수로도 지원받기로 돼있다.

국가운영의 기본요소인 에너지와 식량을 "미제원쑤의 주구"인 남한에
의존하게 된 셈이다.

따라서 강경했던 대남정책이 다소 유연해질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또 만성적인 에너지난, 식량난으로 볼때 남한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쌀회담 타결은 이와 함께 북한 김정일의 권력승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란 지적이다.

김정일은 김일성사후 1주기인 7월8일이 이후 주석 및 당총비서직에
정식취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당국은 주석취임을 기념하기 위한 축하미 마련에 고심해
온것으로 알려지고있다.

그렇지 않아도 쌀이 모자라 군량미까지 빼돌리는 상황에 이른 북한으로선
염치불구하고 남측에 손을 벌리지 않을수 없게 된 것.

이제 "쌀"숨통이 어느정도 트인 김정일로서는 본격적인 승계작업을
연출할 무대가 마련됐다고 볼수있다.

김정일은 또 이번 쌀지원을 혁혁한 내치성과로 내세우며 "경수로확보"라는
외교성과와 함께 "위대한 수령"으로서의 화려한 등장을 꾀할 가능성이 높다.

한편 남측은 이번 회담을 통해 김일성사후의 조문파동으로 굳게 닫혀있던
당국간 대화의 문을 힘겹게 열어제쳤다.

경수로협상 과정에서의 "한국소외"를 만회라도 하듯 정부는 이번 회담을
계기로 절대로 당국간대화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또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등 주변4강의 한반도에 대한 "입김"을
다소나마 줄일수 있는 계기도 마련됐다는 평가다.

남북문제의 "당사자해결"원칙이 늦게나마 모양새를 갖출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번 회담에 임하는 정부의 대북전략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15만t의 쌀은 김정일의 통치기반을 공고히 해줄뿐이며 북한주민의 생활
수준에는 별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북한전문가는 "이번 쌀지원은 김정일의 권력승계 작업을 기정 사실화
하고,한국의 뜻과는 무관하게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북측 꼬임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경수로"는 미국,"쌀"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용이라는 비판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정부는 식량난으로 인한 북한의 급격한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고
따라서 이번 쌀지원도 그런 차원에서 봐야한다는 입장이다.

또 통일을 위해서도 당장엔 북한체제가 안정돼있는 게 좋다는 논리를
펴고있다.

그러나 정부의 이같은 논리가 국민들에게 수용되기 위해선 몇가지 부대
조건이 뒤따라야한다.

우선 이번 회담이 정부의 설명대로 당국차원에서 이뤄졌음을 북측이
확실히 인정해야하며 남북대화 역시 단발성에 그치지 않아야한다.

아울러 한반도문제의 당사자해결이라는 원칙이 이번 회동을 통해 어느
정도 약효를 보이는지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만일 후속대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북일수교의 터전만 마련해주는 꼴이
될 경우 정부는 2천억원이라는 막대한 재원을 부담할 국민들을 설득하기가
힘들어 질것이다.

온갖 해프닝을 벌여가며 언론의 눈을 피해 비공개리에 진행한 이번 회담의
취지가 무색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결국 쌀로 마련된 남북대화의 디딤돌을 계속적인 대화로 이어지게
하느냐가 과제인 셈이다.

<김정욱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