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영진 < 본사 상임고문 >

한국인의 시야가 나라안으로 좁혀진틈에 세계는 반세기의 반추와 미래의
구상에 바삐 돌아간다.

올해로 맞은 2차대전 종전50주년이 그 계기다.

4월30일로 종전20주년을 맞은 월남전의 비판도 맥나마라의 회고록 출간으로
증폭되어 미국의 자존심을 새삼 건드리고 있다.

2차대전은 동서가 다르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돼 45년5월8일 히틀러의 자결로 막을
내린 유럽전쟁의 종전 기념행사는 지난주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에서
릴레이로 열렸다.

세상은 무섭다.

그 대행사에 강대국의 수뇌들은 패전국 총리까지 포함, 단상에 올라 기세를
있는대로 뽐내며 연설을 하고 회담을 했다.

반면 대독전에 참전하여 몫을 하고서도 국제사회에서의 낮은 위상때문에
단상등단은 커녕 화제에 끼이지도 못한 나라도 있다.

그 대표가 폴란드다.

전 국방차관 시코르스키는 베를린 최후의 날에 게양된 국기가 패전 독일을
상징한 백기외엔 소련의 적기와 참전 폴란드사단의 적백기 둘 뿐이었음을
상기시키며 자탄하는 글을 한 미국신문에 쓰고 있다.

"서구국들은 그들 자신이야 과거가 어떻든 문제를 삼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동구국들에는 옥석 가리지 않고 몽땅 말썽거리 취급"이라고 분개
한다.

41년12월 일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터진 태평양전쟁은 원자탄 두발을 맞은
일왕의 항복으로 45년8월15일 멎었다.

당시의 원자탄투하가 정당했느냐는 시비가 재연되는 속에 다가오는 종전
기념행사에는 아직 갈피가 안잡히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동서의 주인공이 다르다.

물심양면 엄청난 보상과 사죄를 치른 독일 대신 사과문 채택에도 저리
인색한 일본이 있다.

한이 안풀린 피해국민 속까지 헤아리면 태평양 전후청산과 새시대 개막에는
다시 반세기가 좋이 걸리겠다.

지난주 유럽행사의 주인공 영.불.러.미.독 수뇌들은 개인 이해까지 겹쳐
심사가 제가끔이었으리라.

특히 퍼레이드 준비에 힘겹게 국고를 축낸 옐친의 허장성세에 속이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사정이 있고, 통합 유럽-평화를 외친다 해도 각자의 내심
에는 공약수가 있다.

장래 제나라의 국운이다.

그점에선 아시아로 눈을 돌려도 크게 다를바 없다.

경제개발 지상에 개방 교류 평화를 표방한다.

어느 정도는 진실이다.

하지만 깊은 곳에 은폐된 것은 국력팽창의 야욕이다.

미.소 군사력이 빠진 동남아 해역에선 벌써 무력시위가 빈번하다.

중.일등 대소국들의 군비경쟁은 가열일로에 있다.

미군존속 찬반을 애드벌룬으로 띄워놓고 서로 속 떠보는 일이 잦다.

이런 시대에 또박또박 실리를 챙기며 장래에 대비하는 나라, 노세와 명분에
쫓겨 하는척 폼만 잡는 나라의 간격은 멀지않아 엄청나게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 어떤 쪽에 속하는가.

올해로 소득 1만달러 시대에 진입한다니 전자에 속한다고 믿어도 되는가.

한마디로 아니다.

소득으로는 일본 호주 뉴질랜드를 빼고도 싱가포르 홍콩 대만의 뒤다.

무엇이 중요한가.

당장은 작고 초라해도 사회를 단단히 다지는 일이다.

콘크리트와 같다.

시간과 돈이 더 들어도 양회에 자갈 모래 제대로 섞어 충분히 양생해야
한다.

급하다고 바다 모래를 쓰니 분당짝이 난다.

왜 사고 연발인가.

하중 넘친들 대수냐는 나룻배 시대의 자세로 철교를 놓고, 장판 좀 샌들
어떠랴는 장작불 시대의 잣대로 도시가스를 다룬다.

그러면서도 사고가 안난다면 그게 이상하다.

국민의식이 시대를 따르지 못하는 근본 이유의 규명도 엇갈린다.

크게는 당국 잘못과 국민의식 낙후로 대립된다.

그러나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차이는 의식수준 높이는 처방에서 나온다.

의식수준 낮은 책임을 서로 미루지 말고 의식높은 부류가 나서서 전체수준
을 끌어 올려야 일이 된다.

그 일은 누구 몫인가.

사회교사의 몫이다.

종교단체 교육기관 언론매체 문화예술인이 그들이다.

정치 행정그룹이 조정역을 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 교사들이 세상에 가장 약고 무책임하여 잘못은 남에게
돌리고 자신들은 실속만 챙기니 문제다.

많은 경우 교회나 사찰은 헌금 거둬서 멋진 건물 짓고 교직자들 이름날리며
거들먹 거리는 잿밥 다툼이지, 어렵사리 낮은데 임하는 구세의 본업은 치장
으로 하는척 할 따름이다.

교육은 입시지옥을 가설해 놓고 학생에게는 고통, 부형에게는 허영심에
비례한 비용 중과하는데 여념이 없다.

문화예술은 포스트 모던 운운하며 말초신경 자극해 돈벌고 귀족행세하는
경쟁이다.

무소부능이라는 언론은 어떤가.

경쟁이란 제꾀에 말려들어, 사명완수가 아니라 누가 출혈 많이 해서 먼저
쓰러지느냐 아귀다틈이다.

바른소리 곧잘 하다가도 사업에 지장이 온다.

출세에 안 좋다.

감이 잡히면 오리발 내민다.

한국인은 남이 수백년 걸쳐 한 일을 단 한 세대에 서둘렀다.

그러면서도 내용마저 다부지길 바라면 과욕이다.

이젠 좀 더뎌도 중간에 돈 자재 떼먹지 말고, 나사 다 조이며 다리 놓고
물건 만들어야 일류가 된다.

꿩먹고 알먹는 뾰족수란 세상에 없다.

남들은 갸우뚱 하는데 스스로 선진국이라 보채대는 어리광 정치엔 이제
신물낼 때가 되었다.

폴란드가 수세기간 유럽서 당해온 괄시와 분통을 한국이 아시아에서 언제
까지건 반복해 겪지 않으려면 이제 겉멋아닌 알맹이를 중시하자.

IPI총회에 몰려오는 45개국 언론인들의 형안이 갑자기 두려워진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