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많은 모임을 갖게된다.

이 많은 모임들중 중요한 모임은 학교의 동창회,지역의 동향회,직장의
동우회,학문연구를 위한 학회,종문의 종친회,신앙모임,취미를 위한
동호동락모임등이 될수있다.

그래서 보통 한사람이 여러개의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필자도 많은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많은 모임중에서 제일 깊은 뜻을 두고 있는 모임이 국민학교
동기생들의 모임이다.

누구나 사연을 가지고 있겠지만 우리 고랑포국민학교 제32회 동기생들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인 듯하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로 되어있는 나의 고향은
지도상으로는 이름이 있으나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수목만이 우거져 있고
더욱이 민통선안의 접적지역이어서 민간인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다만 북한군이 파놓은 제1땅굴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6.25전에는 산수가 수려하고 수로와 육로의 교통중심지가 되어
번화한 곳이었다.

6.25당시 6학년생이었던 우리들은 동란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피란길에
올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실향민의 신세를 면치못하고 있다.

동란중 많은 동기생들이 어린나이로 유명을 달리했으며 현재 연락이
되고있는 생존한 동기생들은 40여명이다.

생존한 동기생들은 수많은 역경을 겪으면서 잡초와 같은 생존의 지혜를
얻어 현재는 산업의 역군,기업의 경영진,공무원,학자등 사회의 곳곳에서
필요한 사람들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생사를 알지못했던 우리 동기생들은 여러모로 수소문을 해서 드디어
지난해 고향의 국민학교 동기생들의 동창회를 결성하고 6.25당시 6년간
국민학교 교과과정을 이수하고도 졸업이란 형식과 절차를 거치지
못했음을 한탄해 관계당국에 사정을 해서 드디어 금년 2월14일 45년만에
국민학교 졸업장을 받게되었다.

우리들은 이제 50대후반의 노년기에 접어들었지만 이를 계기로 지난
45년간의 기억하기 싫은 모든 일들은 잊어버리고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희망찬 젊은 학생으로 돌아가 사회와 국가가 필요로하는 일들을
해보고자 하는 결심을 새로이 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볼수 없는 고향이 그리울때면 항상 만나 옛추억과 고향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