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3.1운동,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의 일이다.

당시 중국의 지식층은 신문화운동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바로 그해에 중국 청도의 동문인쇄국에서는 한국인 진암 이병헌(1870~
1940)의 "유교복원론"이라는 책이 간행됐다.

60쪽 밖에 안되는 60전짜리 이 얇은 책자가 당시 중국땅에서 얼마나 관심을
모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암은 한말거유 암 곽종석문하로서 45세때인 1914년이래 다섯차례나 중국
에 가서 강유위에게서 전통적인 유교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공양학과
변법사상을 익힌 인물이다.

"유교복원론"에서 진암은 유교를 종교로 정립시키기 위해 공자를 절대유일
의 교조로 내세웠고 상제를 주재신으로 부각시켰다.

그리고 유교의 전파방법으로 교당제도확립 역경사업추진 교사제도채택등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했다.

"향교식유교"가 아니라 "교회식유교"라고 설명한 대목도 흥미롭다.

진암이 주장한 유교의 복원이란 한마디로 전통유학자들의 잘못된 관행에
매달리지 않고 공자의 본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는 유교의 종교적 개혁을 주장했던 한국의 "루터"였던 셈이다.

그러나 1923년 향리인 경남 산청군 주성면 사월리에 공교회인 배양서당을
세우고 중국에서 가져온 공자상을 봉안하는 식전에서 진암의 꿈은 산산조각
이 나버린다.

몰려든 경남유림의 성토와 난동으로 식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중국에서 강유위의 혁신을 통한 유교이념의 재현이라는 이상이 손구의
혁명으로 좌절된 것이라면 진암의 꿈은 전통유림의 힘에 눌려 압살당한
꼴이다.

그 뒤 중국이나 한국은 끝내 "전통의 자기극복"을 한차례도 이루지 못한채
정신적 지주를 잃고 서구사상에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형편이다.

유교를 혁명의 적으로 몰아붙여 한때 말살해 버리려 들었던 중국에서
최근 유교부활론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중국의 도덕적 위기를 초래하는 정신오염을 막는 명약은 유교뿐 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강유위도 다시 빛을 볼 날이 온듯 하다.

한국에서도 근래에 "도덕성"이니 "도덕적 위기"니 하는 어휘가 자주
거론되는 것을 보면 남의 일이라고 무심코 들어 넘길 것만은 나닌듯 싶다.

요즘같은 세계화 시대에도 진암의 "유교복원론"이 귀중한 까닭은 "전통의
자기극복"을 이룰수 있는 실마리가 그 책속에 담겨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
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