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적 가치의 보편성 ]]]

좌화륭광 < 경도대학 교수 >

일본문화와 동양문화는 대체로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양자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간격이 있는 것일까.

동양문화에 대비되는 서양문화는 기독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문화는 불교 또는 유교의 산물인가.

동양문화의 원천이 불교가 아닌 것은 불교의 성격자체에서도 명확하다.

그렇다면 동양문화는 유교의 산물이든지 아니면 종교와는 무관한 것이든지
둘중에 하나일 것이다.

유교가 중국의 정치체제를 지탱하고 개인의 도덕을 유지해 왔다는 의미에서
중국에 있어서의 유교는 서양에서의 기독교와 동일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청조까지는 유교의 교양을 가진 사람들이 지식인으로서 존경받았고 그리고
사서오경의 지식을 시험하는 과거에 합격해 관료로서 국가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한국이나 베트남에 있어서의 유교의 역할도 역시 비슷한 것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또 동아시아에 5천5백만이 있다고 전해지는 화교도 유교적 교양과 유교적
도덕의 소유자들이다.

사무엘 헌팅톤이 유교문명권을 세계6대 문명권의 하나로서 언급한 것도
동양문화의 원천을 유교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에도(강호)시대의 일본에서도 송,명의 유교가 지배계급인 무사에게 있어서
필수교양이었고 특히 주자학은 명치유신을 유도할 사상적 무기로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유교는 학파로서의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강해 생활
규범으로서 정착되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명치유신이후의 일본에서는 화혼양재라는 말이 나타내는 것처럼 근대서구의
과학기술과 교양이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됐다.

그 이래 1백30년간에 걸쳐 구미제국에의 유학이 관료나 대기업의 사원들
에게 있어서는 등용문으로 여겨졌고 속칭 "탈아입구"를 국가의 취지로서
받아들였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과거가 없었고 그 대신에 법률과 공학등의 실학적 지식
을 겨루는 고등문관시험이 명치유신이래로 관리등용시험으로 됐다.

제2차대전중에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이 얘기해주는 것처럼 "탈구입아"가
주창되기도 했지만 적어도 전후30년간에는 근대화 또는 "탈아입구"를 다시금
추구해 나갔다.

철학자 화십철랑은 고유문화와 다양한 외래의 문화간에는 한편이 수용돼
다른 한편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고 양자가 대립하면서 융합된다고 하면서
이를 "문화의 중층성"이라고 명명하고 그것을 일본문화의 특성의 하나라고
했다.

명치유신의 시점에서 일본고유의 유교문화가 혹시라도 유교문화와 같은
것이었다면 일본문화라는 것은 고유의 유교문화와 새롭게 들어오는 서구
문화를 융합한 독특한 문화라는 것이다.

동시에 유교문화와는 유사하지 않은 이질의 문화라는 것이 된다.

혹시 화십이 얘기하는 "문화의 중층성"이 일본에 있어서 고유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이나 한국의 문화와 일본의 문화는 서로 다른것이 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