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담 = 김형근 기자 ]]]

"여성용 셔츠블라우스 한장에 7백달러"

미국 뉴욕소재 일류백화점인 Bergdorf Goodman의 1층 메인윈도우
디스플레이 전면에 진열된 국내 한 패션디자이너가 만든 옷값이다.

옷이라기 보다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는 이 셔츠블라우스의 브랜드는
"JINTEOK maid in KOREA"로 명기되어 있다.

현재 국내보다도 패션의 도시인 프랑스 파리와 미국 뉴욕에서 더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주)진태옥(대표브랜드 프랑소와즈)의 진태옥사장이 바로
7백달러짜리 셔츠블라우스를 만드는 장본인이다.

진사장이 뉴욕의 세계적인 백화점에 옷을 진열하게 된 것은 불과 1년6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지난93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컬렉션에 출품했던 작품이
바이어들로부터 호평을 받아 결국 뉴욕백화점까지 진출하게 된것이다.

"그해 11월에 세계 최고급 브랜드만을 선택해 판매하기로 유명한 뉴욕의
Bergdorf Goodman백화점에서 구매주문을 받았지요. 그것도 윈도우디스
플레이를 전제로 계약을 하자고 하더군요. 상당량의 납품계약을 체결했더니
백화점측이 환상적이고 좋은 상품을 팔기로 결심한데 감사하다는 내용의
팩스를 보내왔더군요"

그는 이듬해 주문받은 옷을 납품한뒤 다음작품 구상을 위해 미국 뉴욕으로
갔다.

간 길에 옷이 어느정도 팔리고 있는지를 알고싶어 Bergdorf Goodman백화점
을 방문했다.

납품한 옷은 거의 다 팔리고 몇 장만 1층 메인윈도우에 전시된 것을 발견
했다.

그는 그때 "백화점관계자로부터 JINTEOK 옷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칭찬을
들은 것"이 지금도 귓전에 선하다고 들려줬다.

그러나 진사장의 옷이 처음부터 호평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로부터 10년전 쯤에는 뉴욕백화점에 디스플레이 한번 못해보고
돌아서야 했던 설움이 남아 있어 그의 감동은 더욱 클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진사장이 콧대세기로 유명한 뉴욕 일류백화점의 윈도우를 노크한 것은
사실 지난84년이었다.

그는 당시 실크블라우스와 원피스 몇점을 들고 무작정 백화점을 찾아갔다.

구매담당자를 만나 내 물건이 너무 좋으니 봐달라며 떼를 썼단다.

"담당자가 얼마냐고 묻더군요. 홀세일가격이 1백90달러라고 했더니
아무말도 않고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조금후 괜찮아 보이는 한국산
실크블라우스를 몇장 갖고와서는 이 옷의 리테일가격이 90달러인데 당신것은
너무 비싸지 않느냐며 구매의사가 없음을 내비치더군요"

그는 그래서 담당자에게 "나는 한국서 제일가는 디자이너다. 그것은
옷이고 내것은 작품이다"고 쏘아부치고는 나왔단다.

진사장은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분한 마음이 앞선다며 우리나라 패션
산업도 빨리 정상궤도에 올라서야 할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떼를 썼지만 역시 뉴욕시장 진출의 벽은 높았다.

그는 다시 86년 뉴욕에 쇼룸을 냈다.

백화점에 납품하지 말고 직접 소비자들을 상대로 팔아야겠다는 마음 때문
이란다.

"뉴욕 컬럼버스 애브뉴에 점포 2개를 냈지요. 여피들이 다니는 동네로
기억합니다. 점포 하나는 JINTEOK브랜드로 여성용 의류를 하나는 베베
프랑소와즈브랜드로 아동복 코너를 개설했지요"

그는 점포를 낸 동기가 한국산 패션의류가 절대 싸지않고 제품도 좋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그의 두번째 도전도 이내 벽에 부딪치게 됐다.

현지 패션잡지등에서 괜찮은 작품이라는 평을 해주기도 했지만 홍보활동비
와 운영비가 딸려 어려움을 겪을수밖에 없었단다.

진사장은 끝내 가슴앓이 끝에 가게를 철수했다고 들려줬다.

"그때는 한국 디자이너를 전혀 인정해 주지 않더군요. 그러나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은 절대 버릴수가 없었지요"

그의 집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진사장은 지난 93년 세계적인 패션본고장인 파리에 진출한다.

오랬동안 다져온 그이 결심이 서서히 빛을 보는 시점이었다.

그해10월 개최된 파리컬렌션은 그가 국제패션가에 찬란한 데뷰를 한 계기가
됐다.

당시 프랑스의 전문저널지인 "쥬르날 뒤 텍스틸"은 세계의 톱디자이너들과
함께 진태옥작품사진 2장을 크게 보도했다.

또 "어드벤티지" 2월호에서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디자이너이자
파리의 디자이너인 나란히 진태옥 파리컬렉션 작품을 보도하는 명성을
안았다.

진사장의 세계일류 디자이너를 향한 고집은 더욱 맹렬해졌다.

그는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디자이너와는 거리가
먼 분야에 발을 디딘 딸을 디자이너로 바꾸기로 마음 먹었다.

"딸은 미국 하와이대 치과대학 3학년에 재직중이었지요. 그런 딸을
디자이너후계자로 바꾸는데 꼬박 2년이 걸렸습니다. 무슨 정렬로 그렇게
열심히 딸을 설득했는지 스스로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는 결국 딸을 뉴욕소재 패션전문학교(FIT)에 넣는데 성공했단다.

그딸은 FIT과정을 마친후 지난89년부터 (주)진태옥의 이사겸 디자이너실장
으로 함께 일하고 있다.

진사장이 디자이너계에 첫발을 디딘 것은 지난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뉴스타양재학원을 나온후 이종천패션연구소를 졸업하고는 프랑소와즈
(진태옥)을 설립 직접 운영에 나섰다.

"학교다닐때부터 모양내기를 좋아했지요. 패션이라는 얘기가 뭔지도 잘
모른채 그냥 관심이 많았고 디자이너공부를 했으면 하는 바램이 컸지요.
당시는 일본패션잡지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일본어를 독학하다시피
하면서 패션잡지를 뒤적거렸지요"

그는 일생을 패션디자이너로 일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들려줬다.

"그때 잡지에서 읽은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인 르 샤넬의 전기는 지금도
내인생의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여성들을 콜셋에서 해방시킨 샤넬의
드라매틱한 패션인생을 보고는 언젠가는 그사람같이 될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지요"

그는 이어 88서울올림픽 유니폼 디자인을 맡았으며 아시아나 항공의
유니폼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90년에는 서울패션 디자이너협의회(S.F.A: SEOUL FASHION
DESIGNERSASSOCIATION)를 결성해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다.

88년에는 동아일보사 제정 87년도 디자이너상을 수상했으며 94년에는
제1회 섬유진흥대상 패션디자인 개발부문을 수상했다.

특히 작년11월에는 상공부장관 최고 디자이너상을 수상, 어느정도 고생해온
보상을 받기도 했다.

진사장의 작품은 나름대로 많은 장점을 지닌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패션업계와 주변의 디자이너들은 그의 작품에 대해 "서정적인 분위기의
옷" 또는 "감성이 있는 옷"이라는 평과 함께 "심플하면서도 진태옥의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말들을 많이 하고 있다.

"파리패션가에 동양화를 무척 좋아하는 유명한 디자이너 한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제작품을 보면 한국적 여성미가 떠 오른다고 평하더군요"

그자신 스스로도 자기적품을 와일드하거나 스포티하거나 로맨틱스럽지
않고 동양화같은 서정적인 느낌이 강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진사장은 작년가을 파리컬렉션에서 그의 기량을 충분히 인정받았다.

여성의 밝고 순수함, 깨끗한 이미지를 보여준 그의 컬렉션은 그동안
추구해온 동과 서의 만남을 기본으로 심플한 라인속에서 한국디자이너만이
표현할수 있는 한국고유의 감성들을 현대감각으로 표현해 현지에 모여든
바이어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얻었다고 들려줬다.

"이탈리아의 유명 바이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보기드문 컬렉션
이였다고 칭찬해 주더군요. 현지 전문지들도 동서의 매치를 센스있게 표현
했다고 보도했지요"

진사장은 덕분에 지금까지 절반이상을 차지했던 미국 바이어들보다도
유럽의 바이어들이 더 호감을 보여줬으며 프랑스 이탈리아를 비롯 영국
스위스 스페인 벨기에등 유럽국가들의 주문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조금씩 고생한 보람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디자이너 일만 해왔지요. 지난3월에 김영삼대통령의 유럽순방때
경제인들과 함께 프랑스를 가게됐을때는 정말 기뻤지요. 오히려 좀 더 일찍
파리에서 확실한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느껴지더군요"

진사장은 그때 국내 굴지의 대기업회장들이 파리에 있는 쇼룸을 방문했던
일에 대해서도 무척 고마워했다.

그는 최종현전경련회장 구평회무역협회회장 장치혁섬유산업연합회회장등이
쇼룸을 방문해 파리에서 팔리는 옷들을 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더라고
들려줬다.

"잠자리 옷같은 여성블라우스 한장의 홀세일가격이 5천프랑정도인 것을
보고는 무척 놀라운 표정을 짓더군요. 패션의 중요성을 알겠다고들
하더군요. 앞으로 많은 분들이 도와주게 되면 국내 패션디자이너산업이 한결
발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진사장은 이제 디자이너의 길을 들어선지 30년을 맞아 또한번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남은기간도 디자이너생활을 계속하면서 대한민국의 디자이너로서 세계시장
에서 인정받고자 노력해 나갈 생각이란다.

그는 진태옥이가 블라우스 한장을 7백달러, 1천달러를 받으면 그사람으로
인해 다른 한국상품의 가치가 올라가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일하는 정열은 30대서도 퇴감할수 있고 60대라도 30대 못지않게 일할수
있는것 아니냐"며 기필코 나이를 밝하지 않는 진사장의 집념이 활짝
피어날때 국내 패션디자이너산업도 세계 일류수준으로 도약 할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본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