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란 테러리즘의 약칭으로서 원래 폭력주의 또는 공포정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헌범에 정해딘 절차에 의한 통치로는 혁명목적 달성과 정권유지가 어렵다고
생각될때 혁명집단이 반혁명세력에 대해 폭압지배를 하거나 기성권력집단이
반대세력에 대해 강압지배를 하는 것이었다.

테러는 프랑스혁명에서 비롯되었다.

자코뱅 혁명정부가 왕당파를 비롯한 반혁명세력에 대해 혹독한 탄압과
처형을 하는등 공포정치를 함으로써 구제도의 변혁을 기도했던 것이다.

이른바 적색테러였다.

그것은 그뒤 반혁명적 백색테러를 탄생시켰다.

1974년 이후 자코뱅공포정치에 대한 데르미도르 반동, 1815년 혁명후의
루이왕조에 의한 보나파르트파 탄압, 1871년 파리콤뮌의 실패뒤 베르사유파
에 의한 콤뭔세력 대량학살등이다.

20세기 들어와서는 그보다 훨씬 대규모의 테러가 행해졌다.

1941년 4월 히틀러의 명령으로 시작된 유태인 대학살은 45년5월까지
580만명이나 되었다.

소련에서는 1917~57년 사이의 레닌 스탈린 흐루시쵸프 정권하에서 무려
6,670만명이나 희생되었고 중국의 모택동정권하에서는 1949년에 3,225만
6,170만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산되었다.

또 폴 포트정권하의 캄보디아에서는 800만 인구의 3분의1이 처형당했다.

이들 테러는 모두가 혁명과 반혁명이라는 정치적 구상아래 국가권력에
의해 지향된 것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테러의 보장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사적인 테러단체들이 외국의 체제에 반대하거나 외국의 반체제운동에
가담하여 폭력행위를 저질르는 국제테러리즘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72년 팔레스타인해병운동과 연대한 일본적 군대의 텔아비브공항 무차별
발포살인을 필두로 79~81년에는 이란민병대가 데헤란미국대사관을 점구하여
미국인 인질 52명을 444일동안이나 붙잡아 두었는가 하면 84년에는 한
테러리스트가 TNT로 베이루드의 미국해병대사령부를 폭파시켜 241명의
상병이 죽었다.

그와 유사한 테러가 85년에는 700건, 88년에는 무려 1,000건 넘게
일어났다.

52개테러단체(89년추산)의 활동치고는 놀라운 것이 아닐수 없다.

이번에는 2년전 뉴욕세계무역센터의 악몽이 가시기도 전에 미국
오클라호와시디 연방정부건물에서 대규모 폭파테러가 일어나 충격을 안겨
주고 있다.

우리도 강건너 불이 아님을 명심하고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될것 같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