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을 뿐 아니라 몫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자질구레한 집안일"로 표현되는 가사노동이나 "위대한 모성의 발로"로
격찬되는 자녀양육을 위한 일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몫이지만
이것도 여성만의 몫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넓게 자리잡아가고
있다.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에 대한 노동부담도 부부나 가족성원이 나눠
져야 한다는 부부공동부담론이 점차 우세해지고 있는 것이다.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고르는 남편상,또는 아이를 보는 아버지상은
TV의 광고영상뿐만 아니라 현실로 우리곁에 어느새 다가와 있다.
여자들이 하는 일의 몫에 대한 생각은 그 일의 짐이 무거워 나누어
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공동부담론을 제기했을 뿐 아니라 그값을
경제적으로 따져야한다는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론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전통적으로 아내들이 담당해온 가사노동과 관련된 일에는 보수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통념이다.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통해 우리는 가사노동이 결코 "노는"것과 다를바
없는 가벼운 노동이 아님을 알고 실제로 파출부나 가정관리인에게 적지
않은 보수를 지급하고 있다.
타인에게 대리케 했을 때는 임금노동이 되기에 충분한 가사노동이
아내의 몫이 되면 왜 무임이어야 하는가.
무임일수 없다는 주장이 최근 한 재판결과에서 인정받고 있음을
보았다.
이 사건은 폐암말기의 칠순환자와 그를 돌보던 30대 간병인간의 한달간
결혼생활의 유효여부에 대한 것이었지만 유효를 선언한 재판부의 판결은
아내의 몫을 인정하는 것으로,비록 한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그일이
값어치를 인정받기에 충분하다고 본것이 아닐까.
이 사건의 결말은 몇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첫째 한 가정은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부부중심가치관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러한 가정에서는 자녀의 몫이 아내의 몫을 넘을수
없다는 판단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부계직계 가족원리를 숭상하던 우리의 전통사회는 아내보다 아들에게
모든 우선권을 부여해왔다.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에 뼛골이 으스러졌다 해도 그녀는 칭송의 대상은
될지언정 몫을 인정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내를 단순히 대를 이어주는 존재로,일생동안 가사노동을 제공함으로써
보호받는 시혜의 대상으로 하찮게 보던 우리의 시각은 헌법이 남녀평등권
을 보장한지 반세기가 가까워져서야 가족내의 평등실현이라는 변화를
보이는 듯하다.
91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가족법에는 이혼시 재산분할청구권을 인정하고
있다.
한 가정의 재산은 남편의 외부경제활동과 아내의 내부가사노동에 의해
함께 축적된 것이므로 비단 그것이 외부경제활동자의 명의로 돼있다
하더라도 부부가 협조한 결과이며 따라서 아내가 협력한 잠재적 몫을
정당하게 평가,그 지분을 분할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가사노동에 대한 경제적 가치인정은 94년 개정된 상속세법에 반영돼
증여세와 상속세의 배우자 공제기준이 대폭 상향조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속세 인정공제액을 보면 배우자인 경우 1천2백만원 곱하기 결혼연수의
액수에 기초공제액 1억원을 더하게 돼있어 자녀의 2천만원과는 비교도
안되게 높다.
이는 아내가 무임노동자가 아니며 그의 일은 충분히 보상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제도로써 보여주는 것이다.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가 인정되는 이런 추세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사회노동 직접참가가 더욱 늘어간다.
기혼여성의 노동참여율이 높아지고 이에 따른 자녀양육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보육프로그램 또한 급속하게 보급되고 있다.
일하는 여성의 몫을 챙기고 보호해주려는 노력이 정책적 차원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오늘날은 여성에게 좋은 세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변화속에서 우리는 여성의 일과 그 몫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일에 대해 얼마만큼 반듯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몫이 커졌다는 말에 얼굴을 확 펴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몫을
먼저 챙겨야한다는 말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일하는 여성에 대한 생각을 공정하게 정리해보는 일만이라도 반듯하게
할수 있다면 남녀평등사회의 실현이나 세계화는 한층 앞당겨질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