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계곡과 산등성이를 타고 한점 두점 모여들어 산꼭대기 위에서
거대한 먹구름을 이루었다.

그 먹구름은 하늘 높이 솟구치면서 단단한 구름기둥을 이루는 듯하였다.

그 구름기둥은 뭉칠대로 뭉치다가 마침내 찬란히 흩어지면서 비로
쏟아졌다.

하늘은 용틀임을 하듯이 꿈틀거렸다.

쏟아지는 비를 흠뻑 맞은 논과 밭,나무와 풀들이 일제히 생기를 얻고
환희에 젖어 경련을 일으켰다.

보옥이 드디어 파정에 이른 것이었다.

현실세계에서 처음으로 맛보는 절정감이었다.

그야말로 운우지사요,운우지정이었다.

습인도 온몸이 땀에 젖어 사지를 뒤틀다가 늘어졌다.

보옥은 꿈과 현실에서 동시에 맛본 이 절정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한번 더듬어 보았다.

보옥은 아래쪽으로 자신의 진액이 빠져나가는 순간,위로는 뇌가 두개골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기에게서 자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치 죽음에 이르러 혼이 육체를 빠져나가듯이.

그러나 그때도 백은 육체 주변에 그대로 남는 것처럼 보옥 역시 자기가
몽땅 빠져나간 느낌 속에서도 의식은 그런대로 남아 있었다.

말하자면 혼과 백이 갈리는 듯한 그 절정감은 바로 죽음의 체험,혹은
죽음과 맞바꾸는 쾌감인 셈이었다.

보옥은 낮에는 꿈속 태허환경에서 가경을 상대로 파정을 하고 밤에는
현실 세계에서 습인을 상대로 파정을 하여 하루에 두번이나 몸의 진액이 빠져
나갔으므로 그대로 죽음과 같은 잠속으로 가라앉으려 하였다.

보옥이 꿈속에서 미진 나루터 검은 강물로 빠지면서 가경의 이름을 외쳐
부른 것처럼 이번에도 습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습인아,습인아"

"도련님,제가 여기 있어요"

습인이 몸을 일으켜 조심조심 옷을 챙겨입으며 대꾸하였다.

"너는 죽음을 보았느냐,삶을 보았느냐?"

보옥은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 목소리로 제법 어른스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저는 삶을 보았습니다"

습인은 윤기 있는 목소리로 대답하며,아직도 맨몸으로 있는 보옥을 누나가
어린 동생을 안듯이 꼬옥 안아주었다.

그러면서 이제 앞으로 보옥 도련님을 위해 몸의 봉사도 해드려야겠구나
하고 마음을 다져먹었다.

그런데 보옥이 잠속으로 빠져 들어가면서는 다른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보채를 부르는 것 같다가 그 다음에는 대옥을 불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