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세계를 지배하는 새로운 "언어질서"가 한층 위세를 떨쳐가고 있다.

영어의 종주국인 영국에서 230년의 역사를 자랑해온 베어링은행이 파산하고
또 다른 영어종주국 미국의 달러화가치가 곤두박질치고 있으나 영어의 위력
은 오히려 기세를 올리고 있다.

영어는 물론 오늘날 세계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은 아니다.

통계적으로는 전세계 56억 인구의 5분의1 가량이 쓰고 있는 중국어가 단연
으뜸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는 인구는 30여개국의 7억정도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최근들어 영어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이는 경제적으로 국가간에 서로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무한 경쟁시대에
영어가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탓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동서 냉전시대가 끝난후 러시아어에 발목이 잡혀 있던
"위성국가"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영어에 눈을 부릅뜨고 나선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화바람을 타고 영어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같은 새로운 언어질서와
무관하지 않은것 같다.

공무원들의 영어연수가 크게 강화되고 영어로 회의를 하는 기업 역시
늘어나고 있다.

회사에 따라서는 일주일에 하루쯤 완전히 영어로만 이야기한다는 말도
들리고 있다.

세계는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다.

지난날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자기의 이익을 찾고 지키기에 토끼눈을
뜨고 있다.

우리도 엄청나게 변화하는 세계에 맞는 생존방법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30년의 개발경험을 토대로 다가오는 21세기초에 GNP 2조달러의 통일 한국
이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겠다는 야심적인 목표를 이루어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세계화 깃발을 내걸고 정부나 기업이 외국어, 특히 영어의 교육과 사용을
전례없이 강조하고 나선 것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볼수 있다.

질좋은 제품을 만들고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국경을 달리하는 정부와 정부, 기업과 기업, 또는
비즈니스맨들 사이에 정확한 의사소통을 탁 트이게 하는 언어능력을 키우는
것도 절실하다.

오죽하면 정부나 기업이 외국어 숙달자를 특채하고 나서는 고육책을 들고
나오는지 다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한국의 경제력 수준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우리만큼 영어사용이 뒤진 나라도
많지 않을것 같다.

세계 171개 국가중 131위.

이것이 우리나라의 영어토플 성적순위다.

시험성적의 보편타당성에 대한 논란도 있을수 있겠지만 세계 12위의 무역
대국이라는 한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언어구사 능력인 셈이다.

이같은 결과에 대한 원인을 한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다.

흔히 얘기되는 학습방법의 잘못도 있을수 있고 서로 다른 문화권때문에
서구 나라들보다는 훨씬 더딜수 밖에 없는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것도 사실
이다.

그러나 외국어능력의 배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국의 문화적
배경이나 관습등을 함께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특히 비즈니스등 전문분야에 있어서의 의사소통은 이러한 사회적 관습뿐만
아니라 일의 내용등에 대해 보다 철저한 인식이 필요할 것같다.

결국 세계화를 위한 "국제인"의 양성은 결코 영어단어를 많이 외우고
단순한 의사소통을 잘할수 있는 사람보다는 국제적 감각과 전문지식을
겸비한 전문가의 양성이 주축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의 조기교육이나 외국연수 확대등이 이러한 전문가의 양성에 밑바탕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다만 세계화추진과 함께 고조되고 있는 영어열풍이 한낱 일시적 유행에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경제신문의 자매지인 주간 영자신문 "The Korea Economic Weekly"의
제작에 간여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뒷걸음질치는 달러화의 폭락과 우리사회에 불고 있는 영어 열풍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것 같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