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그의 탄생일을 정확하게 짚어 볼수 있는 유일한 예술장르라
할수 있다.

꼭 100년전인 1895년 3월23일에 태어 났던 것이다.

근대과학기술문명의 발달이 가져다 준 소산이 영화이다 보니 그럴수
밖에 없다.

19세기에 들어와 프랑스인 니엡스와 라게르등의 사진술 발명에 이은
미국인 머이브리지의 달리는 말모습 촬영, 미국인 이스트먼의 롤필름
제도가 영화의 여명을 예고해 준 과학기술의 진보였다.

루이 에이메 오거스틴 루브린스는 1885년 뉴욕 농아연구소의 흰벽에
희미하게나마 움직이는 영상을 비추는데 성공했고 1888년 10월초에는
영국 웨스트 요크셔의 요셉휘트리가 정원을 찍은 매초 10~12코머짜리의
필름을 만들었다.

그런 성과들을 바탕으로 토머스 에리슨은 1899년 키네토스코프라는
최초의 실요적인 활동사진기계를 발명해 냈다.

그것은 구성을 통해 움직이는 사진을 한사람만이 들여다 볼수 있게
된 요지경 안경식의 기계였다.

키네토스코프를 사용해 영화가 처음으로 상업적 흥행을 하게 된
것은 1894년4월15일 뉴욕 브로드웨이에 있는 "홀랜드 브러더즈
키네토스코프 팔레"에서 였다.

관객은 관람료 25센트로 5편, 50센트로 10편씩을 볼수 있었다.

지금처럼 여러 사람이 함께 볼수 있는 영화를 최초로 만들어 보여
준 것은 오구스트 루미에르와 루이스 루미에르 형제였다.

그들은 시네마토그라프라는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하여 1895년
2월11일 특허권을 얻어 냈고 3월23일에는 프랑스의 리용상공장려관
에서 첫 작품인 "조명공장의 출구"를 일반에 공개했다.

이 품은 리용에 있는 뤼미에르공자에서 공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영화로서 영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뒤 100년에 걸쳐 영화는 끊임없는 변신을 거듭해 괄목할 발전을
이룩했다.

촬용과 영사기법의 발전, 작품의 예술성과 흥행성 고양, 발성영화와
컬러화면의 출현, 자본을 배경으로 한 산업화등이 그것이다.

영화는 오늘날 단순한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 보다 넓은 사회문화적
현상, 즉 수많은 사람들을 동일한 언어와 체험으로 묶어 주는
매스미디어가 되었다.

한국에서 수입영화가 첫 상영된 것은 100년에서 8년이 모자란
1903년이었다 .

그 역사가 92년이나 되는데도 산업으로서의 한국영화는 도약을 하지
못한채 외국영화 홍수의 울을 깨지 못하고 있다.

외국산에 압도된 사회문화적 환경을 넘어설 묘안은 없을까.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