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만은 못하지만 지난 93년도 한국 반도체산업은 잘 나갔었다.

세계 4메가D램시장이 본격 형성되면서 매출은 그야말로 순조로웠다.

그러나 그해 7월 한국 반도체 업계는 아연 긴장한다.

생산중단이라는 위기로 몰고갈 뻔한 사건이 생긴 것이다.

사건은 일본 스미토모화학 니이하마 공장의 폭발.이 회사는 반도체용
에폭시 수지 생산업체.에폭시 수지는 반도체 생산의 제일 마지막
공정에 들어가는 포장용지(EMC)를 만드는 원료다.

국내업체는 대부분 이 회사의 제품을 가져다 썼었다.

이 회사 공장이 폭발했다는 것은 EMC 공급선이 끊어진 것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 반도체업계는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다행히 사고복구가 빨라 위기는 면했다.

십년감수한 셈이다.

에폭시 수지는 반도체 제조 원가에 1%도 차지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국내업계는 이것 하나 때문에 목줄이 죄였었다.

반도체 장비와 원재료를 전적으로 해외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실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작년 국내 반도체 장비시장에서 국산품 점유율은 단 8%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대부분 일본등 해외에서 들여왔다.

반도체 생산라인 하나에 들어가는 장비구입액은 6천4백억원(16메가D램
웨이퍼 월2만매 가공기준)정도다.

그러니까 국내업체는 라인 하나를 건설하면서 5천9백억원어치의
장비를 해외에서 구입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전체로는 1조3천9천억원이라는 돈이 외국 반도체 생산업체에
지급됐다.

제조장비의 낮은 국산화율만이 문제가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첨단장비를 제조할 능력이 도통 없다는 점이다.

지난 93년 국내 반도체 장비시장에서 국산장비가 차지한 비율은
13%였다.

작년엔 8%로 되레 뒷걸음질 쳤다.

이유는 이렇다.

작년에 새로 지은 반도체 공장은 16메가D램과 64메가D램 공장이다.

반도체 세대가 높아질 수록 첨단장비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국산장비율이 낮아진 것은 "첨단자"가 붙은 장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원재료분야의 국산화율은 40%선이다.

장비쪽 보다는 나은 편이나 아직도 멀었기는 마찬가지다.

"스미토모 파동"을 일으킨 반도체용 에폭시 수지등 핵심원재료 생산은
꿈도 못꾸는 것이 현실이다.

장비와 재료의 높은 해외의존도-.한국 반도체 산업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장비및 재료기술과 반도체 생산기술은 사다리와 같다"(김치락 반도체
산업협회 부회장).반도체 산업은 양측의 기술이 서로를 지탱해줘야 발전할
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국내에는 생산기술만 있는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불안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제대로 된 비메모리반도체 하나 만들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주변기술부족 탓이다.

말하자면 절름발이라고 할 수 있다.

"절름발이"에 대해선 그만큼 견제구도 심할 수 밖에 없다.

최근 고개를 들고 있는 일본의 "장비무기론"이 그것이다.

"장비는 원래 사는 사람이 폼을 잡게 마련이나 반도체 장비는 그렇지
못하다.

구걸까지 해야 한다"(현대전자 주숭일상무).실제로 작년만 해도
3-4개월이던 납기가 제품에 따라선 1년으로 늘어났다.

한국과 일본업체들이 최근 동시에 16메가D램과 64메가D램 신규공장
건설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수요가 급증하니 장비제조업체의 목에 힘이 들어갈 밖에."아직은
고의적으로 납기를 늦추는 장난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정태신 통산부 전자부품과장).
통상산업부와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장비 개발
사업"이 도 이같은 기우에서라고 볼 수 있다.

98년까지 64메가D램 이상급 장비의 국산화율을 50%선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앞으로 4년간 정부와 기업이 모두 5백억원을 갹출하기로 했다.

팔을 걷어붙인 모습이다.

늦었지만 다행스런 일이다.

개별기업들도 장비 국산화에 적극적이다.

선진업체와 공동으로 설립한 첨단장비 생산업체가 늘고 있는 것이
이를 설명해주고 있다.

삼성이 일본 도와사와 손잡고 세운 한국도와가 올초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전량 수입에 의존해 오던 웨이퍼도 지난해부터 포항제철 계열의
포스코 휼스와 LG그룹의 실트론에서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작년과 재작년에 8개의 크고 작은 합작회사가 생겼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장비나 원재료는 안중에도 없던 것을 비교한다면
큰 변화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터닝 포인트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D램 신화의 저력을 반도체 전분야로 확산하기 위한 시동이 걸리느냐
꺼지느냐의 기로에 있다.

엔고라는 호기가 장비나 원재료 도입비용을 더 높이는등 국제경영환경까지
악재로 작용하고 있는 게 한국 반도체산업의 현실이다.

<조주현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