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논단] 등고자비는 불변의 덕목이다..호영진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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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도 강조되던 옛 교훈 가운데 이젠 누구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게 내팽개쳐진 낡은 덕목이 "등고자비"다.
지위가 오를수록 겸손하라는 가르침으로 "벼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비유가 따른다.
귀중하던 덕목이 빛바래게 된 주된 원인은 역설적이지만 선거 민주주의와
상품 자본주의의 잘못된 모방에서 찾아야 할것 같다.
이 두 명제는 동전의 양면으로 분명 한국인뿐 아니라 지구인 모두가
갈구하는 시대이상이다.
그 두 제도의 성공이 자유와 복지의 담보라는 믿음은 이제 신화의
무게다.
냉전종식 후엔 더욱 부동이다.
선거나 사업의 주역들이 왜 스스로를 낮추고 고개를 숙여선 안되는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다.
가령 "여러분 저는 타후보 보다 나은 것이라곤 없습니다.
그래도 저에게 표를 주십시오" 한다면 말이나 되는가.
상품도 마찬가지다.
미국식을 모방해 일전에 모정당의 서울시장 예비후보 몇명이 모여
나는 이런 이런 점에서 잘났다고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화면이 방영되었다.
웬일일까.
자신들도 어색해했고 그걸 본 사람들도 뒷맛이 개운치가 않았다.
아직 미국 수준엔 못 미쳐서일까.
정치나 사업이 개입되지 않은 개인생활에도 비슷한 변화가 왔다.
청한 손님에게 "차린것 없지만 많이 드세요"하는 겸손은 이미 겸손도
아니다.
"맛있어요.
많이 드세요" 해야 어울리게끔 세상은 변했다.
몇세대 안된 사이의 이같은 격변을 표현방식의 변화로만 보긴 어렵다.
불가불 사고방식의 변화라든가,발상의 전환이라는 상투어를 동원할수
밖에 없다.
그러면 그런 내면적 발상의 전환은 왜 일어났는가.
이런 때일수록 가까운데서 시사점을 찾는 쪽이 빠르다.
정치지도자 고관대작 명망가등 이른바 지도층 인사들의 언동을 보라.
그들에게선 오만이 넘친다.
그걸 보면 부러움보다는 실망을 느낀다.
그 쯤의 거물이면 겸손도 갖췄으리라는 기대가 배반당하는 환멸이다.
문제는 이 자만증이 고소대처의 고질로 머물질 않고 신드롬으로 구석구석
만연하는데 심각성이 있다.
그중에도 대중시대의 영웅이라 일컫는 인기인들에게서 도지는 증세가
눈에 잘 띈다.
길옥윤같은 예술적 존재야 추모를 받아 마땅하지만,안하무인으로
자기도취에 빠지는 새파란 인기인들이 텔레비전속에 늘어만 간다.
인기를 의식한 직업적 몸짓이 아니라 아랫배에서 우러나오는 우월감이다.
선망의 시선과 고소득에서 오는 자부심을 가누기 힘겨워한다.
폐단을 알고도 시청률만 의식한 토크쇼등의 양산 경쟁에도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근본문제는 깊은데 있다.
겉만 번지르르 하면 후한 점수를 매기는 이 사회의 가치기준 변화방향이
유죄다.
가정 직장 공공장소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가릴것 없이,알맹이가
아니라 겉 모양과 형식에 얽힌 순위판정이 정당화되고 있다.
학생의 우열을 사람됨 아닌 점수하나로 측정한지 이미 오래고,사람의
격을 아파트 평수와 차 등급으로 매기는 일 또한 상식화됐다.
그러나 다시,잘못은 거기에 있는게 아니다.
주택이건 승용차건 그것은 경제력의 한 반영일 따름이다.
따라서 더 힘껏 노력해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은 오히려 권장사항이지
경원과 매도의 대상은 아니다.
시대 적합적이다.
진짜 반시대성은 무엇인가.
아무리 민주화가 돼도 낮아지기는 커녕 일로 드높아만 가는 관존민비
가치관과 권위주의로의 대 후퇴가 문제다.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이 사회 만병의 근원은 명.권.부의 다중욕구를
모두 채우려는 과욕이상 없다.
지방선거를 석달 앞두고 벌써 전국 방방곡곡에 거센 정치바람 선거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더구나 한번에 네자리를 찍는 통합선거는 처음이라 풍향을 가리기
힘든 회오리 모랫바람이 불기 쉽다.
후보자 유권자 관리자 모두가 혼란에 빠질 미증유의 아사리판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선출될 자리가 5천을 헤아리니 평균 3대1만 잡아도 출마자 1만5천,4배면
2만명이다.
법상 허용된 선거벽보 1백만장과 공식 홍보물 16억장,투표용지 1억2천
만장을 합치면 2.5t 트럭 3천4백95대분이란다.
투개표는 그래도 잠시니 그렇다 치고 이제부터 투표전일 까지 선거운동의
어지러움이 겁난다.
그 많은 인쇄물과 총동원된 선전방식을 통해 그 수많은 사람이 모두
나 잘났다고 목청 높일 장면을 상상만 해보라. 선거란 힘들구나,민주주의란
값비싸구나,장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어쩌랴.군주전제 군사독재 프롤레타리아독재 등등 인류가
경험한 그 어느 정치보다 나은 제도가 이것이니 비싼 값을 지불해서라도
사야 한다.
희망은 있다.
가령 3.15선거 보다 7.29선거가 낫고,13대 보다 14대가 개선되는
식으로 횟수를 거듭하면서 선거와 정치가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전진이 아니라 정체나 퇴보를 거듭할때 이 땅에 희망은 없다.
대통령도 의원도 지사도 군수도 대를 거듭할수록 수준이 향상되고,
무엇보다 겸손하며 정직해져야 한다.
경망스런 제자랑꾼이 아니라 힘이 셀수록 머리를 숙일줄 아는 등고자비의
덕인이 선거에 추대되는 풍토로 바뀌어야 권위주의가 아니라 봉사정신이
넘치는 살맛나는 세상이 온다.
몽매간에 염원하는 통일 선진국으로 다가가는 길도 그 속에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0일자).
않게 내팽개쳐진 낡은 덕목이 "등고자비"다.
지위가 오를수록 겸손하라는 가르침으로 "벼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비유가 따른다.
귀중하던 덕목이 빛바래게 된 주된 원인은 역설적이지만 선거 민주주의와
상품 자본주의의 잘못된 모방에서 찾아야 할것 같다.
이 두 명제는 동전의 양면으로 분명 한국인뿐 아니라 지구인 모두가
갈구하는 시대이상이다.
그 두 제도의 성공이 자유와 복지의 담보라는 믿음은 이제 신화의
무게다.
냉전종식 후엔 더욱 부동이다.
선거나 사업의 주역들이 왜 스스로를 낮추고 고개를 숙여선 안되는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다.
가령 "여러분 저는 타후보 보다 나은 것이라곤 없습니다.
그래도 저에게 표를 주십시오" 한다면 말이나 되는가.
상품도 마찬가지다.
미국식을 모방해 일전에 모정당의 서울시장 예비후보 몇명이 모여
나는 이런 이런 점에서 잘났다고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화면이 방영되었다.
웬일일까.
자신들도 어색해했고 그걸 본 사람들도 뒷맛이 개운치가 않았다.
아직 미국 수준엔 못 미쳐서일까.
정치나 사업이 개입되지 않은 개인생활에도 비슷한 변화가 왔다.
청한 손님에게 "차린것 없지만 많이 드세요"하는 겸손은 이미 겸손도
아니다.
"맛있어요.
많이 드세요" 해야 어울리게끔 세상은 변했다.
몇세대 안된 사이의 이같은 격변을 표현방식의 변화로만 보긴 어렵다.
불가불 사고방식의 변화라든가,발상의 전환이라는 상투어를 동원할수
밖에 없다.
그러면 그런 내면적 발상의 전환은 왜 일어났는가.
이런 때일수록 가까운데서 시사점을 찾는 쪽이 빠르다.
정치지도자 고관대작 명망가등 이른바 지도층 인사들의 언동을 보라.
그들에게선 오만이 넘친다.
그걸 보면 부러움보다는 실망을 느낀다.
그 쯤의 거물이면 겸손도 갖췄으리라는 기대가 배반당하는 환멸이다.
문제는 이 자만증이 고소대처의 고질로 머물질 않고 신드롬으로 구석구석
만연하는데 심각성이 있다.
그중에도 대중시대의 영웅이라 일컫는 인기인들에게서 도지는 증세가
눈에 잘 띈다.
길옥윤같은 예술적 존재야 추모를 받아 마땅하지만,안하무인으로
자기도취에 빠지는 새파란 인기인들이 텔레비전속에 늘어만 간다.
인기를 의식한 직업적 몸짓이 아니라 아랫배에서 우러나오는 우월감이다.
선망의 시선과 고소득에서 오는 자부심을 가누기 힘겨워한다.
폐단을 알고도 시청률만 의식한 토크쇼등의 양산 경쟁에도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근본문제는 깊은데 있다.
겉만 번지르르 하면 후한 점수를 매기는 이 사회의 가치기준 변화방향이
유죄다.
가정 직장 공공장소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가릴것 없이,알맹이가
아니라 겉 모양과 형식에 얽힌 순위판정이 정당화되고 있다.
학생의 우열을 사람됨 아닌 점수하나로 측정한지 이미 오래고,사람의
격을 아파트 평수와 차 등급으로 매기는 일 또한 상식화됐다.
그러나 다시,잘못은 거기에 있는게 아니다.
주택이건 승용차건 그것은 경제력의 한 반영일 따름이다.
따라서 더 힘껏 노력해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은 오히려 권장사항이지
경원과 매도의 대상은 아니다.
시대 적합적이다.
진짜 반시대성은 무엇인가.
아무리 민주화가 돼도 낮아지기는 커녕 일로 드높아만 가는 관존민비
가치관과 권위주의로의 대 후퇴가 문제다.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이 사회 만병의 근원은 명.권.부의 다중욕구를
모두 채우려는 과욕이상 없다.
지방선거를 석달 앞두고 벌써 전국 방방곡곡에 거센 정치바람 선거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더구나 한번에 네자리를 찍는 통합선거는 처음이라 풍향을 가리기
힘든 회오리 모랫바람이 불기 쉽다.
후보자 유권자 관리자 모두가 혼란에 빠질 미증유의 아사리판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선출될 자리가 5천을 헤아리니 평균 3대1만 잡아도 출마자 1만5천,4배면
2만명이다.
법상 허용된 선거벽보 1백만장과 공식 홍보물 16억장,투표용지 1억2천
만장을 합치면 2.5t 트럭 3천4백95대분이란다.
투개표는 그래도 잠시니 그렇다 치고 이제부터 투표전일 까지 선거운동의
어지러움이 겁난다.
그 많은 인쇄물과 총동원된 선전방식을 통해 그 수많은 사람이 모두
나 잘났다고 목청 높일 장면을 상상만 해보라. 선거란 힘들구나,민주주의란
값비싸구나,장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어쩌랴.군주전제 군사독재 프롤레타리아독재 등등 인류가
경험한 그 어느 정치보다 나은 제도가 이것이니 비싼 값을 지불해서라도
사야 한다.
희망은 있다.
가령 3.15선거 보다 7.29선거가 낫고,13대 보다 14대가 개선되는
식으로 횟수를 거듭하면서 선거와 정치가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전진이 아니라 정체나 퇴보를 거듭할때 이 땅에 희망은 없다.
대통령도 의원도 지사도 군수도 대를 거듭할수록 수준이 향상되고,
무엇보다 겸손하며 정직해져야 한다.
경망스런 제자랑꾼이 아니라 힘이 셀수록 머리를 숙일줄 아는 등고자비의
덕인이 선거에 추대되는 풍토로 바뀌어야 권위주의가 아니라 봉사정신이
넘치는 살맛나는 세상이 온다.
몽매간에 염원하는 통일 선진국으로 다가가는 길도 그 속에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