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구나. 내 마음을 그리 잘 알아주니"

보옥은 자기보다 두살 많은 습인이 어떤 때는 누님 같기도 하여
평소에도 의지하는 마음이 많았는데, 오늘따라 그녀가 더욱 의젓하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런데 도련님, 도대체 어떤 꿈을 꾸었길래 허벅지가 흥건하도록
그런 것이 흘러나왔어요?"

습인이 이제는 수줍어하는 기색을 약간 덜어내며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꾼 꿈을 어찌 한두마디로 말할 수 있으랴"

그러면서 보옥이 습인에게 꿈 이야기를 비교적 세세하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오늘 낮에 내가 이 방으로 와서 잠이 들지 않았더냐.

그런데 마치 생시와도 같이 진씨가 나를 인도하여 어디론가로 데려
가는 거야.

얼마 가다보니 붉은 난간을 두른 아름다운 정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푸른 숲과 맑은 냇물이 펼쳐지는 거야.

아무래도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곳 같지가 않았지.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이곳에서 오래 살면 그 지긋지긋한 공부에서 놓여날 수 있고 부모나
어른들의 잔소리와 꾸중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구나 싶더군"

"공부하라는 소리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꿈속에서까지 그런 생각들을
하셨을까요?

우리 같은 시녀들 보고는 아무도 공부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데
말이죠.

그러고 보면 우리 팔자도 그리 나쁜 것이 아니군요"

숩인이 보옥이 안쓰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지. 자나 깨나 공부하라, 공자를 읽어라, 맹자를 읽어라 하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지.

그래서 정말 어떤 때는 열심히 일만 하는 너희들 시녀들이 부럽기도
했단다"

"그래 그 다음 어떻게 되었어요?"

"그런 생각들을 하며 사방을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문득 산 너머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는 거야.

봄꿈은 구름따라 흩어지네(춘몽수운산). 어쩌고 하는 노래였는데,
그 목소리가 어찌나 낭랑하고 아름다운지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지"

보옥은 그 노랫소리를 떠올리는지 몽롱한 눈빛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 노랫소리가 여자의 목소리였군요.

누구 목소리였어요?

보채 아가씨 목소리였나요?

대옥 아가씨 목소리였나요?"

보옥과 보채, 대옥의 미묘한 삼각관계에 대해 눈치를 채고 있는
습인이 미리 짐작을 하며 물어보았다.

"보채도 아니고 대옥도 아니고, 눈부시도록 아리따운 선녀 하나가
산길을 따라 내가 있는 곳으로 사뿐사뿐 걸어오는 거야"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