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TV가 처음 선보인 때는 지금으로부터 30년쯤 전인 66년 8월이었다.

미국 우주선 "제미니 10호"가 우주공간에서 사상 처음 표적위성과 도킹
하는데 성공했다고 해서 세상이 떠들썩하던 즈음이었다.

당시 개발된 국산TV는 흑백 진공관방식의 19인치짜리였다.

요즘 기준으로 따지면 볼품 없는 "습작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개발업체인 금성사(현 LG전자)의 월 생산능력은 단 500대뿐이었다.

돈을 갖고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런만큼 당시 국산TV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그럴만도 했다.

적어도 한국인에게 흑백TV 국산화는 미국의 제미니 10호가 인류의 우주
정복 가능성을 제시한 것 못지않은 의미를 던져줬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그랬다.

"보릿고개"로 대변되는 만성적 굶주림과 헐벗음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자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고 있던 때였다.

그로부터 10년뒤인 76년.

미국에선 화성탐사 우주선인 "바이킹 1호"가 발사됐고, 한국에서는 컬러TV
가 처음 생산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한강의 기적"과 함께, 국산 컬러TV의
등장은 기업에 "하면 된다"는 기술적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성과였다.

다시 10년이 흐른 86년.

국내에서 첫 대규모 국제 체육제전인 "아시안 게임"이 열렸던 이 해 가전
업체들은 전통적인 브라운관 방식이 아닌 액정방식의 컬러TV를 개발해 냈다.

이 때를 전후해서 금성사 삼성전자등 한국의 가전업체들이 TV의 종주국인
미국에 생산공장을 짓는 대역사를 이루기 시작했다.

우리 기술로 금발의 미국인들을 근로자로 고용해 TV를 만들어 현지에
판매하는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국산 TV기술의 진보는 갈수록 그 템포를 빨리하고 있다.

국산TV가 탄생한지 30년이 되는 내년에는 차세대TV인 고화질(HD)TV가
상품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미 HDTV의 전단계인 극장화면형 와이드TV가 대중화돼 가고 있는 추세다.

이같은 TV산업의 발달은 국내기술 전반에도 적지 않은 자극을 주어왔다.

특히 TV제조에서 파생된 기술은 한국의 전자산업을 견인해 왔다.

한국이 올들어 일본을 제치고 CPT(컬러브라운관) 최대생산국으로 자리잡게
된 것도 TV조립산업의 발달에 힘입은 측면이 크다.

TV생산량이 늘어남에 따라 CPT생산규모가 지속적으로 확대돼온 결과다.

뿐만 아니다.

TV산업의 눈부신 발달은 유리패널 튜브등 각종 부품분야는 물론 VCR등
새로운 영상기기 개발을 이끌어왔다.

요컨대 TV산업은 한국의 현대 산업사를 대변하고 있다.

한국의 본격적인 경제발전은 국산TV의 탄생과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산 TV산업의 발전과 이에따른 TV보급 확대는 외형적 산업발전뿐 아니라
경제발전에 기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역할도 컸다.

국산TV 등장과 함께 "보는 문화"가 국민들사이에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
이다.

"읽는 문화"에만 길들여져 있던 한국 국민들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이는 기존의 인식틀을 깨는 의식변화로 이어졌고 때마침 거세게 일기
시작한 경제개발 붐과 맞물려 "변해야 산다"는 실체적 각성의 촉매제로
작용한 것이다.

진공관방식의 흑백TV로부터 시작된 한국의 TV산업은 멀티미디어시대의
도래와 함께 PC(개인용 컴퓨터)겸용의 PCTV와 주문형비디오(VOD)의 출현
등으로 새로운 변신의 도약기를 맞고 있다.

이에 맞추어 국민들의 정보마인드가 더욱 확산.증폭돼갈 것은 불문가지
이며, 한국 산업의 2단계도약이 이어질 것도 분명해 보인다.

< 이학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