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민 < 극동방송 홍보팀장 >

지혜의보고 탈무드에는 진정한 사랑을 가늠하는 재미있는 예화가 하나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대단한 보물을 한 가지씩 가진 삼형제가 살고 있었다.

맏형은 아주 먼곳까지 볼수 있는 망원경을, 둘째는 이세상 어디든 단숨에
날아갈 수 있는 양탄자를, 그리고 막내는 어떠한 병도 낫게 할 수 있는
신비의 사과를 갖고 있었다.

어느날 망원경으로 세상을 둘러보던 맏형은 왕명으로 성벽에 써붙인 벽보에
시선이 머물렀다.

거의 포기단계에 이른 공주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을 왕의 사위로 삼고
왕위까지 물려주겠다는 아버지의 간절한 호소가 담겨져 있었다.

둘째의 양탄자를 타고 삼형제는 왕궁으로 달려갔고 막내의 사과를 깨물어
먹은 공주는 즉시 병이 낫게 되었다.

자, 누구를 왕의 사위로 삼을 것인가.

지혜로운 왕은 셋째를 사위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했다.

공주의 병을 낫게하기 위해 사용된 망원경과 양탄자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사과는 남아 있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무슨 뜻인가.

남김없이 주는 사랑의 본질을 존중한 결단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 시대에 우리가 갈구하는 사랑의 공통분모는 "남김없이 주는 것"이다.

언젠가 구소련 레닌그라드의 네프스키 대로를 걷는 순간 일말의 위기감같은
것을 느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식량과 자유를 원하며 네프스키 대로를 행진하는
노동자들의 시위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듯 했다.

황제에게 노동자의 가난과 개혁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려는 계획으로
교회기와 십자가를 들고 나선 14만여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의 평화시위에
러시아 정부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눈덮인 광장을 벌겋게 물들인 그들의 피는 1917년의 2월 혁명,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정붕괴를 실현시킨 10월 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을 무색케 하는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여름궁전만을 보아도 알수 있듯이 귀족중심의 화려한 문화예술 뒤에는 강제
노역으로 착취당한 소외된 군중들이 있었다.

부와 권력의 상징인 귀족들과 결탁해 본질을 잃어버린 기독교는 외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버린 대중으로부터 역시 버림받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종교가 제 구실을 못할 때 그 사회는 몰락할수 밖에 없다는 하나의 실증을
목도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라는게 무엇인가.

다같이 공평하게 나누자는 것 아닌가.

아니러니하게도 이 "소유의 공평한 분배"는 신약에서 그 이론을 빌려왔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함정은 여기에 있다.

초대교회의 분배가 자발적인 사랑에 근거했다면 사회주의의 그것은 이론과
강제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와 구구절절이 러시아의 혁명을 들추어내는 이유가 있다.

이기적인 부의 축적이 갖지 못한 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부추기고 사회의
불만세력을 키우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이미 지존파 사건이나, 박한상군의 부모 살해사건등이 터질 때마다 사회
각계에서 목청을 돋우던 원인분석이다.

이제 전에 없이 경제적 부흥기를 누리고, 전에 없는 종교의 전성기를
맞이한 오늘의 한국사회를 사는 우리들이 위기의식을 느낄 때가 되었다.

1인당 GNP 8천달러의 한국, 내자녀의 영재교육에 열올리는 부모들 뒤에는
7천5백여명의 결식 아동과 1만5천여명의 소년소녀 가장들이 소외당하고
있다.

통일을 외쳐대는 목청들 뒤에는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방황하다가 코뚜레에
꿰어 끌려가는 동포들이 있다.

우리에게는 모두 책임이 있다.

그러나 특별히 좀 더 배운 사람, 좀 더 가진 사람, 그리고 좀 더 빨리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다.

내가 받은 모든 혜택은 나누어야 할 책임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