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초고속 시대라지만 재정경제원이 20일 오후 발표한 금융개편
추진계획은 너무 성급한 느낌이 든다.

개편방향과 5개 관련법의 개정안이 잘됐다 못됐다를 따지기에 앞서
우선 절차의 정당성과 추진일정의 타당성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다.

그동안 개편안 마련에 있어 비공개주의로 일관한 재경원의 고충을 짐작하지
못할바는 아니다.

수많은 관련기관은 물론 경제계 학계와 일반에 이르기까지 워낙
관심범위가 넓은 주제이기 때문에 섣불리 협의를 하다간 중구난방으로
일을 망치지 않을까 지레 겁을 먹을만 하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중립성 보장으로 축약되는 금융개편 과제가
그만큼 까다로운 이유는 현 종사자들의 신분적 이해라는 한계를
넘어 경제 산업 전반에 걸쳐 깊게 영향을 미칠 중차대한 사안이라는데
있다.

재경원 당국자는 오랫동안 의견이 백출한 문제라 한은과 협의없이
이미 노출된 찬반론을 토대로 개정안을 마련함에 무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거 자유분위기가 보장된 제대로의 토론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었다고 본다.

80년대 후반에도 논의는 열을 띠었으나 결론없이 끝나고 말았다.

한은과 학계는중앙은행의 독립을,재무부는 그 반대로 맞서다가 언제나
처럼 묵살과 미봉 (미봉)으로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러나 제도는 다름아닌 시대의 반영이라고 볼때 통화가치 안정을
정부에서 독립된 기관이나 제도에 맡길만큼 그동안의 국내 여건이
성숙지 못했었다고 할수도 있다.

이제는 어떤가.

이 물음에도 단답은 어렵다.

확장된 경제규모나 외환.자본시장의 개방,전면적인 제도의 국제화
필요성등을 감안할 때 더이상 정부의 중앙은행 장악은 온당치 못하다는
이의가 제기된다.

그럼에도 과연 정부의존적인 금융계가 일조일석에 자율능력을 발휘하리란
기대 또한 걸기 어려운게 사실이다.

물론 금융부문이 낙후할수록 정부의 보호간섭을 빨리 차단해야 한다는
역설도 성립한다.

더구나 세계화추세 속에 재경원이 금융개편안을 지체치 말고 최단시일
내에 밀고 나가겠다는 의욕에 사로잡히는 사정은 이해될수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중요한 것은 시간여유를 갖는 일이다.

7월1일 시행 목표,거기 역산한 이번 국회 상정.통과는 그야말로
초속도다.

자칫하면 개편 취지부터 혼동되기 쉽다.

재경원의 안으로는 주목표가 중앙은의 중립성 보장을 통한 통화가치의
안정인지,한은 독립성엔 관심이 없고 금통위를 통한 사실상의 정부권한
유지가 진의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조금 귀를 기울이면 이번 안에 찬반조차 판단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첫째 한은과 시은의 관계 즉 은행 자율경영 문제,둘째
시은과 기업과의 관계,셋째 금융과 실물과의 관계,넷째 해외 금융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한은법등 5개법 개정안 어디에도 없어 개정의
진의를 모르겠다는 지적이다.

금융개편의 궁극적 목표를 생각한다면 이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통화가치 안정을 통한 국민경제발전과 국민의 이익증진이 궁극목표라
한다면 자율경영을 통한 은행의 경쟁력 강화와 고객의 편익제고,각
금융권간의 연결,금융의 국제화실현 등은 중간목표일수 있는 것이다.

수십년 벼르다가 모처럼 단안을 내린 것은 잘한 일이다.

그렇다면 힘이 들더라도 당당하게 공론을 수렴해 뒤탈없는 제도를
만들어야 옳다.

반론 겨를을 주지 않기 위해 기습 통과시켰다는 오해를 두고두고
산다면 결코 현명치 못한 처사다.

더구나 많은 이견의 소지를 안고 있는 채로 말이다.

첫째 가장 오랜 초점인 한은의 독립성은 제고가 아니라 약화되는 쪽이다.

총재를 금통위 의장이 겸직하고 감독기능도 분리돼 나간다.

그렇다면 기관으로서의 한은에는 발권과 국고수납 이외에 어떤 통화정책
기능도 없어진다.

둘째 금통위 의장및 위원의 추천과 구성의 문제다.

재경원장 추천으로 의장과 동시에 총재가 되면,또 9명중 6명이 정부추천
위원이면 한은 뿐아니라 금통위도 재경원 손안에 놓인다.

재심 청구권에 예산승인권까지 재경원장이 갖는다.

셋째 감독기능의 혼선이다.

금통위와 한은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대신 감독권은 정부가 갖겠다면
또 몰라도 권한을 극대화한 재경원이 감독권 마저 쥐려 함은 불균형의
심화다.

넷째로 위에서 지적됐듯이 한은의 중립성 못지 않게 은행법 개정등에
시은의 경영자율화가 반영되어야 한다.

스스로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정부나 한은의 간섭으로 부터
은행의 독자성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이번 금융관련법의 손질은 통화신용 정책부분에만 국한돼선 안된다.

그동안의 한국금융의 적폐를 혁파하고 세계 수준을 지향하는 법
제도의 정비가 이 기회에 함께 단행돼야 한다.

따라서 규제강화보다 반규제가 더 요구된다 할 것이다.

광범한 시각의 토론을 거치기 위해서도 시간을 다투는 개정은 자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제발 쫓기듯 하지 말고 만사 절차의 정당성을 존중하기 바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