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화제] 일 소니생보, 독특한 인력관리로 고성장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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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녀의 보험사"
소니생명보험에는 여자영업사원이 단한명도 없다.
영업사원 1천6백명 전원이 남자사원이다.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 보험설계사의 상당수가 여성인 점을 감안해볼때
특이한 인적구성이다.
인적구성의 또 다른 특징은 신입사원이 한명도 없다는 점이다.
전원이 30~40대의 중년으로 미쓰이물산 미쓰비시석유 아사히맥주 히타치
제작소등 일류기업으로부터 전직해온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 일류대출신의 고학력소유자인점도 눈길을 끄는 점이다.
일보험업계의 계속되는 불황에도 소니생명보험의 지난 10년간 보험수입료가
10배 가까이 신장한 "성공의 비밀"은 바로 이러한 인력관리정책에서 찾을수
있다.
고학력의 일류기업출신들이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피보험자의 요구에 적합한
다양한 보험상품을 설계해 주기 때문에 계약실적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
하고 있다.
실제로 보험업계를 통틀어 피보험자의 요구에 부합하는 보험설계를 할수
있는 전문가가 많지 않기 때문에 소니의 이런 장점은 돋보인다.
세밀한 계산없이 판매에만 급급한 나머지 몸으로 부딪치는 보험판매로는
영업신장에 한계가 있다.
여성영업사원이 많은 타보험사의 경우 1인당 월평균 계약건수가 3~4건인데
반해 소니의 경우 8건을 기록했다.
이에 힘입어 소니의 94년 상반기 영업실적은 전년동기대비 36.6% 늘어난
4조6천억엔에 달했다.
경쟁업체의 평균 영업신장률 4.8%에 비해 경이적인 수치이다.
소니생보의 발전원동력인 일류기업출신들이 왜 대거 소니로 몰려들었을까.
영업실적에 따른 성과급이 파격적인점등 철저한 실력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업사원과 영업소장의 평균 연봉이 각각 1천8백만엔, 2천5백만엔이지만
개인능력에 따라 커미션을 합쳐 연간 수입이 1억엔인 사람도 있다.
소니생보는 지난 79년 미국의 프루덴셜사와 합작사로 출발했다가 87년부터
독자노선을 걸어왔다.
창사이래 일류기업출신의 남성사원채용전략을 시도해 보험업계의 다크호스
로 부상한 소니는 일보험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 서명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6일자).
소니생명보험에는 여자영업사원이 단한명도 없다.
영업사원 1천6백명 전원이 남자사원이다.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 보험설계사의 상당수가 여성인 점을 감안해볼때
특이한 인적구성이다.
인적구성의 또 다른 특징은 신입사원이 한명도 없다는 점이다.
전원이 30~40대의 중년으로 미쓰이물산 미쓰비시석유 아사히맥주 히타치
제작소등 일류기업으로부터 전직해온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 일류대출신의 고학력소유자인점도 눈길을 끄는 점이다.
일보험업계의 계속되는 불황에도 소니생명보험의 지난 10년간 보험수입료가
10배 가까이 신장한 "성공의 비밀"은 바로 이러한 인력관리정책에서 찾을수
있다.
고학력의 일류기업출신들이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피보험자의 요구에 적합한
다양한 보험상품을 설계해 주기 때문에 계약실적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
하고 있다.
실제로 보험업계를 통틀어 피보험자의 요구에 부합하는 보험설계를 할수
있는 전문가가 많지 않기 때문에 소니의 이런 장점은 돋보인다.
세밀한 계산없이 판매에만 급급한 나머지 몸으로 부딪치는 보험판매로는
영업신장에 한계가 있다.
여성영업사원이 많은 타보험사의 경우 1인당 월평균 계약건수가 3~4건인데
반해 소니의 경우 8건을 기록했다.
이에 힘입어 소니의 94년 상반기 영업실적은 전년동기대비 36.6% 늘어난
4조6천억엔에 달했다.
경쟁업체의 평균 영업신장률 4.8%에 비해 경이적인 수치이다.
소니생보의 발전원동력인 일류기업출신들이 왜 대거 소니로 몰려들었을까.
영업실적에 따른 성과급이 파격적인점등 철저한 실력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업사원과 영업소장의 평균 연봉이 각각 1천8백만엔, 2천5백만엔이지만
개인능력에 따라 커미션을 합쳐 연간 수입이 1억엔인 사람도 있다.
소니생보는 지난 79년 미국의 프루덴셜사와 합작사로 출발했다가 87년부터
독자노선을 걸어왔다.
창사이래 일류기업출신의 남성사원채용전략을 시도해 보험업계의 다크호스
로 부상한 소니는 일보험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 서명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