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목숨을 거는 순정파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가.

맨처음 고백이 어려워 한달 두달 망서리기만 하거나 한번쯤 뒤돌아봐
주기를 바라면서 따라만 가는 것은 그야말로 옛이야기인가.

맘씨좋고 상냥한 여자가 진짜 여자가 아니라 예쁘고 늘씬한 여자야말로
최고의 여자인가.

대중가요의 가사는 세태를 가장 잘 반영한다.

세대별로 좋아하는 노래가 같은 것은 그 가사속에 같은 시대를 산 사람
만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가요의 가장 큰 주제인 사랑의 방법과 형태 또한 시대에 따라 변한다.

60년대이전의 "알뜰한 당신" "무너진 사랑탑"이나 60년대의 "가슴아프게"
"노란셔츠의 사나이", 70년대 송창식이나 어니언스의 연가가 은근하고
순정적인 사랑을 노래했다면 80년대 해바라기 이선희 이광조 이문세의
발라드를 거쳐 탄생된 90년대의 가요는 보다 노골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을
담고 있다.

"내가 싫어진걸 나는 알고 있어 가식적인 말로 나를 위로하려고 하지마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나를 설득하려고 하지마 이젠 내 맘속에 너의
자리는 없어 모두 버린거야" (이미경 "이유같지않은 이유")

"농담반 진담반으로 얘기해 우린 친구와 연인의 중간쯤 주말엔 극장도
같이 가고 모르는척 난 네게 기대지만" (황세옥 "결론")

"선물을 준 숫자만큼 날 사랑할까
- 아닐꺼야 나 너에게 지쳐가고 있어" (DJ덕 "슈퍼맨의 비애")

이런 가사들은 이른바 지고지순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사랑하던 사이라도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다는 신세대식 사랑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나이든 세대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림에도 불구, X세대로 불리는 젊은층
에게는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그러나 신세대 가요가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순간에도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였었지.
하지만 내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 (조관우 "늪")

이 노래는 불륜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기독교 방송에서 금지곡 처분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일부가요는 여성을 외모중심 그것도 말초 신경적인 용어로
평가, 우리사회의 선정성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잘빠진 몸매와 외모 너보다 더 잘난 여자 찾길 원한 건 사실이야"
(김원준 "너없는 동안")

"너는 얼굴도 예쁘지만 늘씬한 몸매가 더욱 돋보여. 니가 거리를 걸어
가면 길가던 남자들이 걸음을 멈추지" (조관우 "애인만들기")

연초 현역 육군중위로 은행을 털려다 잡혀 파문을 일으킨 하기룡씨
(25)가 "노래에도 나오듯 예쁜 여자친구와 빨간차도 갖고 싶었다"고
밝힌 것은 이같은 가요가사가 젊은층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예로 지적됐다.

이에 따라 신세대가요 가사에 대한 심의나 제재 필요성에 대한 논의도
일고 있다.

"가요는 세태를 반영하게 되어있다.

돌출적 부작용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양식문제라고 본다."
(김정효. 27. "스타맥스" 마케팅과)

"모방범죄의 가능성은 가요뿐만 아니라 소설에도 항상 존재해왔다.

현재 가요의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비문이 횡행한다는 것이다."
(연세대국문과 마광수 교수.44)

이와 달리 학계나 기성세대 일반은 최근 가요가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머잖아 닥칠 일본대중문화 전면개방을 앞두고 건전한 우리문화의 육성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이다(서울대사회학과 신용하 교수.58).

가요가사에 대한 심의나 제재가 필요한지는 쉽게 결론 지을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실제로 최근에는 심의나 제재가 줄어들고 있다.

가요심의의 경우 93년에는 불합격23건 수정 통과 2백72건이었으나
94년에는 불합격1건 수정통과 59건에 불과했다(공윤자료).

결국 중요한 것은 대중가요 역시 창작자와 수용자의 건전한 상식과
자율적 판단에 의해 만들어지고 불려져야 한다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26일자).